커가는 감염병 공포… 동아시아 공동방역 체계 급하다

입력 2020-03-07 04:0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팬데믹(Pandemic·전 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 공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사태 초기부터 중국발 여행객의 입국을 전면 금지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경제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전면적인 입국 금지 조치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글로벌 역학 관계가 방역 문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감염병 대응을 위한 동아시아 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사스·메르스 때도 금지 안해

정부는 지난달 4일부터 코로나19의 진원지인 중국 후베이성을 14일 이내 방문하거나 체류한 적 있는 모든 외국인에 대해 입국을 금지했다. 이후 중국 전 지역을 대상으로 입국 금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는 방역 전문가들의 의견과 대중국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라며 조치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감염병 발생 시 입국 금지·제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발병국인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상으로 입국 금지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6일 “정부가 감염병의 세기와 검역으로 걸러지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입국 제한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적으로는 중국인 입국 금지를 시행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다. 출입국관리법 제11조에 따르면 법무부 장관은 ‘감염병 환자, 마약류 중독자, 그 밖에 공중위생상 위해를 끼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대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 후베이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했던 사람도 ‘공중위생상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방역 및 출입국 관리는 국제법상 주권사항으로 인정받는다. 중국인 입국 금지가 국내법·국제법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경제 관계를 가장 먼저 고려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5424억 달러(646조9700억원) 가운데 대중국 수출액이 1362억 달러로 25.1%에 달한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은 중국과 가장 인접해 있고 인적교류, 무역·경제 관계가 가장 많은 나라다. 연간 1000만명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할 경우 향후 중국과의 교류가 급감해 경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정부가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지난해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모처럼 훈풍이 불어온 양국 관계가 입국 금지로 다시 얼어붙을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는 시 주석의 올해 상반기 방한을 적극 추진 중이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정부가 국민의 건강 안보와 한·중 관계의 외교·경제적 이익을 놓고 전체 국익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나라마다 판단은 달라

코로나19 유입 방지를 위해 한국발 여행객의 입국을 제한하는 나라들 중 상당수는 방역 능력이 부족한 국가다. 보건·의료 인프라 부족으로 감염병 대처가 어려운 나라들은 아예 문을 걸어 잠그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수의 서방 선진국들은 한·중·일 등 코로나19가 확산된 나라를 대상으로 강도 높은 입국 제한 조치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방역에 대한 자신감을 토대로 외교 관계 등을 감안한 결정으로 보인다.

다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입국 금지 조치를 망설임 없이 시행하는 나라도 있다. 수출의 25%를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베트남은 한국인과 중국인 입국 금지를 시행 중이다. 외교 관계보다 방역을 가장 우선한 결정이다.

한·중·일 공동방역체계 필요

입국 금지·제한의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감염병마다 성질이 달라서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자칫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현영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큰 틀은 있을 수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특성에 따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마다)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의학적 정보를 반영해 정부가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한·중·일이 나서 동아시아 차원의 공동 방역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감염병은 앞으로 또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개별 국가만의 방역으로 감염병 확산을 차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은 “사스 등을 겪을 때마다 관련 주변국들과 방역체계 논의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논의는 없었다”며 “한·중·일 중심으로 북한까지 포함해 공동 방역시스템에 대해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