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습관점검을 통한 인생 리모델링

입력 2020-03-03 18:25

“습관은 인생의 우연한 방문자일 수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단골손님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인생의 주인으로 등극한다.”

어떤 행동을 반복함으로 습관이 형성 된다. 그런데 한 번 만들어놓은 습관은 나를 끈질기게 따라 다닌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떼버리려고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결국 나에게 형성된 습관은 내 인생을 결정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나에게 형성된 습관은 나 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너’와 ‘우리’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남편이 갖고 있는 좋지 않은 습관 때문에 아내가 힘들게 되고, 부모가 가진 악한 습관 때문에 자녀들이 깊은 상처를 받고, 평생 불행한 운명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기에 습관을 우습게 여기서는 안 된다. 작은 습관일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인생은 습관의 모음집이다. 한 사람을 분해하면 각종 습관의 퍼즐들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습관 중에는 좋은 습관이 있는가 하면, 나쁜 습관도 있다. 내 인생에 플러스가 되는 습관이 있는가 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습관도 있다. 악과 죄와 연결된 습관도 있는가 하면, 선과 연결된 습관도 있다. 그렇기에 유익하지 않은 습관은 빨리 청산하고, 유익한 습관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습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해롭다면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빨리 청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동원해야 한다. 운동하고 산책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면 다른 것을 가지치기해서라도 습관화시켜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습관을 점검하고 습관을 조정하고, 교정하면 내 인생은 새롭게 리모델링될 수 있다.

작가로서 갖고 있는 나의 습관이 몇 가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모하는 습관일 게다. 내 손에는 늘 노트가 떠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 지나가다가 보는 간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영감들. 이런 것들을 순간순간 메모한다. 또 다른 습관은 독서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손에 책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습관이 있다. 같은 일을 보더라도,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묵상하고 사고하는 시간을 통해 글의 소재를 찾는다. 이런 습관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작품이 나오게 된다. 그만큼 게으를 겨를이 없다.

내 인생을 좀 더 나은 인생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순 없을까? 물론 있다. 습관을 점검해서 플러스 습관을 강화하고, 마이너스 습관을 폐기하면 얼마든지 인생을 리모델링하게 될 게다. 그러기 위해서 습관 몇 가지를 점검해 보면 좋을 게다.

나의 듣는 습관은 어떤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떤 사람을 잘 들어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신없이 자기 말만 쏟아놓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되, 적극적인 경청, 공감적 경청을 해야 한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부했다. 어려서부터 형성된 ‘습관’이라고 단정 짓는다(렘 22:21). ‘여호와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아예 익숙한 체질이 되었다는 게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즐기는가? 들려지는 말씀을 잘 흡수하고 소화하는가? 들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되뇌어 묵상하는가? 그 말씀이 인생길 걸어갈 때 힘이 되고, 등불이 되어 말씀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는가?

나의 예배습관은 어떤가? 홉니와 비느하스는 예배습관에 실패하고 말았다(삼상 2:12-13). 제물을 자기 마음대로 취하고, 회막을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까지 했다. 가인은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의 실패자가 되었고, 급기야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인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자인가?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는가? 부모나 배우자에게 끌려와서 예배하는 자는 아니겠지. 예배드리는 한 시간이 지겨워 몸을 꼬는 예배자도 아니겠지. 어차피 드리는 예배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성공했을지라도, 몸으로 드리는 생활예배의 실패자 역시 진정한 예배자는 아니다. 공동체가 드리는 교회 예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생활 예배도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기도습관은 어떤가?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나는 기도의 동산을 두고 있는가? 다니엘은 습관을 따라 고국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 위기에 처할 줄 알면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친구들을 찾아 함께 기도했다. 나는 기도의 골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고 있는가?

나의 언어습관은 어떤가? 바울은 공동체에 악성종양처럼 악한 영향을 전염시키는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경계하고 있다(딤후 2:17). 어리석은 사람들은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고(잠 25:9), 남의 말 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잠 18:8). 너를 칭찬하고 자랑해주고, 너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과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하고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막장언어가 아니라 맛깔 나는 말,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는 축복언어를 하며 살 순 없을까? 남을 무시하는 말보다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하며 살 순 없을까?

나는 감사습관을 가졌는가? 불평습관을 가졌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회만 있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습관을 가져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셨으니까. 행복 바이러스를 유포하려면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불평과 원망습관을 가진 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불행 바이러스를 유포시킨다. 모든 게 감사해서 감사하는 게 아니다. 모든 상황이 원망스럽고 짜증스러워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게 아니다.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환경이나 사람일지라도 감사로 받아들이면 그 환경과 사람이 변하는 걸 보게 된다. 그래서 감사의 사람은 기적을 만들며 산다.

나는 어떤 태도습관을 가졌는가? 겸손이 체질화 되어 있는 사람이 있지만 교만이 체질화 된 사람도 있다. 그렇게 잘 난 것도 없으면서 교만하고 거만을 떠는 사람이 있다. 남들이 볼 때 우스운 일이다. 대놓고 말하진 않겠지만. 그런가 하면 꽤 괜찮은 사람인데, 전혀 티내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체질인 사람이 있지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습관화 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툭하면 다투고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해와 화목을 이끌어 내는 사람도 있다.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가, 온유하고 부드럽게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사람인가? 내가 갖고 있는 태도가 인격을 드러내고 운명을 결정한다.

나는 어떤 감정처리 습관을 갖고 있는가? 속상한 감정을 하나하나 축적해 가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속상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는 ‘나는 뒤끝이 없다’고 말한다. 상대방은 이미 총에 맞아 죽은 줄도 모르고. 지혜로운 감정처리는 감정을 조절해서 표현하는 형일 게다. 이런 사람은 돋보이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 운전대를 잡으면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안전운행을 하고 안전거리 확보를 하며 조심스레 운전하는 사람도 있다. 욱하는 성격으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사람이 많다. 분을 쉽게 내어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잠 15:18). 툭하면 짜증내고 화내는 사람도 많다.

내가 갖고 있는 습관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점검해 보자. 그리고 내 인생을 갉아먹고 마이너스가 되게 하는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수정해 보자.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유익하게 만드는 플러스 습관은 더 발전시켜 나가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모습은 발전되어 있으리라.

김병태 목사

◇필자 프로필=성천교회 담임목사 / 금천경찰서 경목 / 총회세계선교회(GMS) 이사 / 개혁주의 설교학회 임원 / 총신대학교목회신학전문대학원 강사, 백석대학교 강사 역임

◇저서 : <습관을 바꾸면 죄를 이긴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장로> <행복한 집사> <행복한 권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