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로 높이 올라 영혼 살리고 바로 세운다

입력 2020-03-03 20:42
인천 청운교회 전경

인천시 계산동의 청운교회는 ‘두 날개로 비상하여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교회’라는 표어 아래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꿈을 펼쳐 나아가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청운교회는 ‘따뜻한 사랑이 있는 교회, 축제가 있는 교회, 복음의 비전이 있는 교회’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이와 함께 청운교회는 ‘비전 10. 100. 1000. 10000’의 특이한 목표를 갖고 있다. 10개 지교회와 100명의 선교사, 1000개의 셀과 중앙아시아 개척 그리고 10000명 성도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청운교회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자 1990년 인천시 임학동에 70평 남짓의 상가건물에서 개척된 이래 30년 동안 일관되게 이 표어와 슬로건, 목표를 견지하고 있다. 이는 교회 담임목사와 교역자, 성도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청운 사명선언문’에 잘 담겨 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으로는 서로를 사랑하며, 밖으로는 불신자를 섬기고, 앞으로는 새로운 리더를 세움과 목장(셀)의 번식으로 인천시를 거룩한 도시로 변화시키며 세계선교를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자.”

청운교회는 전형적인 ‘무에서 유에서 낳은’ 교회의 모델이다. 단 한 명의 성도도 없이 개척돼 지금의 성장을 이룬 과정은 사람으로 치면 그야말로 입지전적이다.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전도활동으로 한 가정 한 가정을 세워간 것이다. 개척 6개월 후 30명의 성도로 부흥하고 1년이 지났을 때에는 100명의 성도가 함께 예배하는 교회가 됐다.

전도를 통해 예배의 자리로 어렵게 인도된 이들 가운데 개척교회 예배당의 불편함으로 더러 교회를 떠나기도 했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붙여주셨다는 것에 감사와 감격이 넘친다.

청운교회는 초창기부터 전도사역과 함께 제자훈련에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때 제자훈련을 통해 훈련된 이들이 현재 교회 장로들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목사와 교역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뜨거운 열정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더욱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됐다. 이런 노력으로 청운교회는 개척 4년 후 효성동에 70평 남짓의 상가를 매입해 또 하나의 예배처소를 만들었다. 임학성전과 효성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셨고 개척 후 7년이 지났을 때에는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가 됐다.

결국 청운교회는 240평 성전 부지를 매입하게 됐다. 모든 성도가 하나 되어 벽돌과 시멘트를 직접 나르며 시작된 예배당 건축은 은혜 가운데 마무리되고 새로운 예배당을 통해 개척초기 가졌던 꿈에 한발 더 내딛게 됐다. 교회는 그 후 본당 증축과 교육관 건축으로 이어지면서 출석성도 500명을 넘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전도하는 교회, 가정이 행복한 교회라는 인식이 자리 잡히게 됐다. 개척 12년이 됐을 때는 예배당이 좁아져 또 다시 교회를 이전해야 되는 상황을 맞았다.

마침내 2007년 4월 본당 3000석 규모의 현재의 예배당으로 입당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 지역 속에서 전도 잘하는 교회, 가정이 행복한 교회를 뛰어 넘어 개척초기 가졌던 한국교회를 섬기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교회로 발돋움하게 됐다.

청운교회는 개척초기부터 유달리 영혼구원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랐다. 강대석 담임목사는 날마다 세상에 보내져서 활동하는 성도들을 통해 교회의 사명이 수행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성도들을 훈련해 그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기를 바랐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을 의식함으로써 목사의 동반자임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강 목사는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목회 현장은 복음이 필요로 한 모든 곳이었다. 바로 그 곳에서 영혼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달려갈 각오이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간증-강대석 담임목사
바람바람 전도축제가 잠자던 열정 깨워


나는 전남 해남 땅끝마을 출신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중에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더욱 고생을 하며 성장했다. 그럼에도 늘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꿈을 품었다. 그 이유는 내 안에 자리 잡은 신앙 때문이었다.

나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도리어 나의 믿음은 더욱 성장했다. 그런 중에도 목사는 되기 싫었다. 주위 어렵게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그냥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장로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군복무 중 뜻밖의 일이 찾아왔다. 신학도 하지 않은 내가 대대교회를 섬기는 군종이 된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요 은혜였다. 더구나 당시 우리 부대에는 교회가 없어서 민간인들도 함께 예배드리는 일반교회를 섬겨야 했는데, 그 부대의 담임목사 역할을 내가 하게 됐다. 그때 하나님께서 전도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셔서 군인과 가족들 그리고 마을사람들 모두를 전도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 전도에 열정만 가지고 있던 내게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께서 행해 주셨다. 특히 대대장을 전도하게 됐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지금도 생생하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대대장이 진급을 앞두고 있을 때 훈련에 앞서 전 병력이 기도하면 우리 부대가 1등을 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는데, 그대로 들어맞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통해 부대교회가 차고 넘치게 되는 부흥을 경험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게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주셨다. 군 제대 후 신학교에 입학해 교회를 섬길 때에도 놀라운 부흥들을 경험하게 해주셨다. 맡겨진 부서마다 전도를 통해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예배당 이전을 놓고 전 성도가 기도하던 중 마침내 2007년 4월 본당 3000석 규모의 현재의 예배당으로 입당하게 됐다.

입당초기 예배인원이 1000명이 되지 않았기에 빈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 빈자리를 보며 모든 성도가 전도에 힘써야겠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면서 더 열정적으로 전도하게 됐다. 입당 몇 년만에 빈자리가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됐다.

비로소 중대형교회로서 시대적 지역적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생각에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교회에서 시작했다. 그러면서 개척초기 가졌던 한국교회를 섬기는 모델교회로서의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매년 전도축제를 하긴 했으나 점차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영혼을 살리고 세워야겠다는 절박한 마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제는 전도를 해도 편하고 세련된 것들만 추구하려는 마음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박병선 장로님을 통해 바람바람성령바람 1차 전도축제를 진행하게 됐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 전도축제가 우리 성도들 안에 잠자고 있었던 전도의 열정을 되살렸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성도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스로 전도법을 구상해보고 자비로 전도물품을 만드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전에 많아야 20명 남짓했던 새가족 등록자가 바람바람 성령바람 전도축제 기간에는 매주 100~150명이 됐다. 40일 동안 총 753명이 등록을 하고 100명 넘게 전도한 전도왕이 5명이 나오게 됐다. 바람바람 성령바람 전도축제를 통하여 성도들이 다시금 전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2차 바람바람 성령바람 전도축제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나는 모든 성도가 동일한 꿈, 즉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전파의 장으로 나아가기를 고대한다. 청운교회를 통해 인천을 넘어 대한민국에 세계 속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올 날을 기대하고 있다. 청운교회는 오늘도 그 꿈을 향하여 정진해나가고 있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회 현장은 복음이 필요로 한 곳이었다. 나는 바로 그 곳에서 영혼을 살리고 세우기 위하여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달려갈 것이다.


▒ 간증-강윤희 사모
비난과 칭찬이 공존했던 초기 전도활동 성장 밑거름


나는 충북 청주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각종 문화혜택도 누렸다. 특히 유·초등부 시절, 교회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으로부터 큰 혜택을 누렸다. 어린 시절 믿음의 멘토이기도 한 선생님 께서 꼼꼼하게 피아노 개인레슨을 해주신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사랑을 듬뿍 받는 수혜자였다. 교회를 가면 늘 기쁘고 행복하고 필요를 채우셨다. 더 나아가 학생시절, 청년시절도 하나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 없었고 늘 하나님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고 채움을 받는 축복의 삶을 살았다.

이런 풍성하고 여유롭고 기름진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훈련의 시간, 고난의 시간이 시작됐다. 신학생 남편과 결혼을 한 후 첫째 딸 3살, 둘째 아들 6개월 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성도는 하나도 없었고, 교회는 상가 4층이었다. 손이 한창 많이 가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교회 안 모퉁이에 칸막이를 쳐서 생활하며 목회를 시작했다.

개척초기부터 남편 목사님은 늘 교회의 존재목적이 영혼구원이라고 선포하셨다. 실제로 개척한 후 할 수 있는 일은 전도 외에는 없었다. 성도가 없다 보니, 다른 할 일이 없어 눈만 뜨면 오로지 전도만 했다. 그리고 밤에는 기도에 매달렸다. 낮에 만났던 사람들의 인상착의나 이미지 등등 메모된 것을 타자기로 타이핑해서 그 리스트를 가지고 기도했다. 제대로 된 이름보다는 파마머리 아줌마, 조광빌라 1동 203호, OO 엄마 등등 명단을 가지고 한 분 한분을 호명하며 기도했다.

당시 전도의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겨울 정도다. 아파트 입주 전도할 때는 미리 사무실 여직원에게 스타킹세트, 간식 등 선물로 주고 이사 올 날짜를 미리 알아놨다가 전날 밤 도화지에다 “입주를 환영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청운교회”라는 환영문구를 박은 포스터를 준비했다. 그리고는 이삿날 새벽 남편 목사님과 가서 집안을 깨끗이 청소를 해주고 현관문에 준비한 입주 포스터를 붙였다. 거기다 이사가 시작되면 이삿짐을 함께 나르고 정리해 주면서 친분과 신뢰를 쌓았다. 그 이후에도 작은 선물을 사들고 가서 교제하면서 전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전도를 하다보면 교회에 와서 정착하기도 하지만 인사치레로 교회에 왔다가 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놀랍게도 전도한 사람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서 자진등록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도에 주력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믿음 있는 직분자나 서울로 다니면서 멀어서 교회를 옮기려고 하던 분들이 새벽기도를 나왔다가 등록해서 교회의 큰 일꾼이 되기도 했다. 동네에서는 청운교회는 극성이라고도 하고, 열정이 넘친다고도 하는 칭찬과 비난이 공존했다.

그때 당시 우리는 교회의 전도법을 ‘이 잡기 작전 전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상가마다 건물마다 이를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전도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개척초기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전도하면 더 소중하고 귀한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척초기부터 우리는 행복한 목회를 했다. 특히 하나님께서 교회의 부흥과 함께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게 해주셨다. 그런데 최근 2~3년 전부터 왠지 교회가 정체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다.

위기감을 느껴 여러 가지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애를 써봐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박병선 장로님의 ‘바람바람 성령바람 진돗개 전도법’을 만나게 해주셨다. 박 장로님은 개척초기의 열정을 회복하게 했다. 진돗개처럼 매달려 한 영혼 한 영혼을 전도하는 간증을 들을 때 너무나 부끄럽고 회개가 됐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실 영혼을 향해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간절함이 있으면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