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빌의 뇌 속: 빌 게이츠를 해독하다’(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에 이런 장면이 있다. 빌 게이츠가 어느 날 딸에게 소아마비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준 후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무엇을 하실 건데요?” 게이츠는 앞으로 소아마비 재단을 세워 이 질병을 지구상에서 퇴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까 비디오에 나온 그 소녀를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고요.” 게이츠는 그제야 자신의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만일 그 소녀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깨달음이 그가 나중에 세계에서 가장 큰 자선재단을 설립해 모범적으로 운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잃은 양 한 마리를 100분의 1이라는 숫자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얼굴과 이름을 아는 나의 자녀, 나의 식구라고 여긴다면, 위기에 처한 그 양을 구하기 위해 못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최근의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이 비유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 감염병과 싸우는 방식이 99마리 양의 안전을 위해 1마리의 잃은 양을 우리에서 멀리 쫓아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중국에서 감염자가 많이 생겼을 때 우리 사회 많은 사람이 그들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중국인들의 입국을 막을 것인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재난은 의료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나빠서는 아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우리나라가 주요 감염국이 되자, 우리가 쏘았던 화살이 그대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이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감염군에 대한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세상 사람들의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는 1%를 희생해서 99%를 지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비유의 목자는 1%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왜냐하면 그 1%를 내 딸,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99%를 구원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목자는 100%를 다 구원할 때까지 쉴 수 없다.
성경은 인류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고귀한 존재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모습을 보면서 인류는 정말 유기체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한 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 가장 약한 지체의 회복이 온몸의 건강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감염자가 속해 있는 국가나 집단에 낙인을 찍고 그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 처지가 180도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보다 더 치명적이고 극복하기 어려운 차별과 증오의 병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 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함이고, 치료제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과연 우리가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우한 교민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한 아산 시민들, 봉사 의료인력 모집 소식에 대구로 달려간 205명의 의료인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했다. 이제 우리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