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22절은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다. 이를 통해 ‘숨은 생명이 되고 숨은 영생이 된다’는 내용을 생각해 보자.
숨을 쉰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코로 쉬는 숨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밥을 먹지 못하면 40일 이상 살 수 없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7일을 넘기기 어렵다. 숨을 쉬지 않으면 3분도 버틸 수 없다. 생명 유지는 호흡과 직결돼 있다. 뇌세포는 1분만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도 죽기 시작한다. 숨은 생명의 현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만큼 아슬아슬하고 기적적인 일은 없다.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숨은 의식하지 않고 쉰다.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호흡이고 의식하지 않고도 하는 게 호흡이다. 그런데 호흡을 의식해 보면 어떨까. 우리 숨은 그 어떤 현상보다 영적이고 예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의 숨은 깊고 그윽하다. 아랫배가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느리게 숨을 쉰다. 화가 나거나 불안하면 숨이 짧아지고 거칠어진다. 콧소리를 내면서 어깨까지 들썩거리기까지 한다. 근심이 있거나 가슴이 답답하면 한숨을 쉰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호흡이 가늘고 길어지는데, 미워하는 사람과 있으면 호흡이 거칠어진다.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을 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턱 밑에서 가쁘게 숨을 쉬다 짧은 숨을 내뱉고 숨을 거둔다.
호흡은 육체뿐 아니라 내면과 영혼까지 연결돼 있다. 성경도 인간의 생명을 숨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렇게 하니까 생명이 됐다고 하셨다. 생기는 하나님의 숨이라고 돼 있다. 하나님의 숨이 들어오니 그게 곧 생명이 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숨이다.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 40년을 걷게 하시며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고 주리게 한 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걸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
예수님도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후 마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제자들을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숨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고 또 성령이라고 했다. 숨이 말씀이고, 말씀이 곧 성령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참된 생명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숨을 인간 생명의 근간으로 정하셨다. 그 숨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숨과 말씀, 두 개를 짝지어 놓으신 것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신 것이다. 쉬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건 신앙인의 사명이다.
“보아라. 1분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지 않니. 바로 그거야. 내 말씀을 받아 숨 쉬지 않으면 너는 1초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란다.”
숨은 단순히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위한 기초 작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까지 스며들어오는 걸 말한다. 숨이 깊고 잔잔하면 몸이 건강해진다. 그 숨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밀려오는 영적인 호흡이라면 몸뿐 아니라 영원히 숨 쉴 수 있는 생명까지 얻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숨을 쉬고 있다. 그 숨을 잔잔하고 고르게 쉬어야 한다. 그 속에서 숨결 안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함께 호흡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