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출간된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는 이색적인 책이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는 전남 순천에 사는 할머니 20명이 순천시 평생학습관에서 익힌 글과 그림으로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 작품이었는데, 출간하자마자 반응이 대단했다. 각종 매체가 이 책에 주목했고 할머니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책 작가 김중석(53)은 이들 할머니를 상대로 그림 수업을 진행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2016년부터 매년 16주 과정으로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엔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그리게 했고, 그다음엔 동네 풍경을, 이후엔 ‘기억’ 같은 주제어를 제시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갤러리에서 만난 김중석은 “수업 초창기에는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는데, 인세가 들어오면서 할머니들이 전문가용 물감도 쓰게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림을 향한 순수한 감정을 잃고 살았는데,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런 감정을 되찾게 됐어요.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게 기쁘더군요.”
김중석을 만난 건 최근 그가 출간한 그림책 ‘그리니까 좋다’(창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책에는 김중석이 3년 전부터 틈틈이 그린 괴물 그림이 한가득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기면 괴상하면서도 귀엽고,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지만 전문가의 붓질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그런데 김중석은 왜 하필 괴물을 그렸을까. 그림책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그는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왜 매번 비슷한 것만 그려야 하나’ 생각하다 괴물을 떠올렸다. 상상 속 캐릭터인 만큼 “더 자유롭게, 내 멋대로” 그릴 수 있었다. 김중석은 “재밌게 작업했다. 그림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니 이걸 엮어서 책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괴물 그림을 그리면서 수업에서 했던 말들을 정리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며 “과거 내가 발표한 그림책이 어린이를 위한 것이었다면 신작은 모든 연령대의 독자를 위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그리니까 좋다’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들이 직접 그려보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김중석 역시 “독자들이 ‘나도 이 정도 그릴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한다면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림 그리기는 고상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누구나 낙서하듯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막연하게 그림 그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생각이 깨졌으면 해요.”
김중석은 소설가 김중혁의 형이기도 하다. 형이 그렇듯 김중혁은 SNS나 각종 매체에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를 자주 선보여 눈길을 끌곤 했다. 김중석은 동생이 ‘그리니까 좋다’를 혹시 봤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자 “우리 형제는 (일과 관련된) 그런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며 미소를 지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