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예술가와 소상공인이 만나면

입력 2020-02-21 04:01

예술가들이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예술가는 대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생각해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예술가의 재능이 캔버스 위에 발휘되면 순수미술 작품이지만, 작업실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 예술가가 작품 판매만으로 먹고 살 수 없다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어떤 게 있을까.

그러한 고민이 발단이 되어 예술가와 소상공인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순수미술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의 조합은 북한 장교 리정혁과 남한 기업가 윤세리의 만남만큼이나 낯설고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쌓인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드라마보다 재미있고 훈훈하다.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주로 회화, 판화, 조소, 도예, 미디어 등을 전공한 청년들이다. 누구도 의뢰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작업실에 틀어박혀 매뉴얼이 없는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출퇴근도 주말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회와의 접점이 많지 않고, 만나는 사람의 폭도 좁다. 정육점 사장님과 매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을 터였다.

소상공인의 영업 분야도 다양하다. 미용실, 식당, 카페, 호프집, 당구장, 세탁소, 노래방, 꽃집, 부동산 등 다양한 업종의 가게들이 참여한다. 대부분 1인 자영업자로 사장님 혼자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끔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영업을 준비하고, 손님을 기다리다가, 정해진 시간에 마감한다. 하지만 고된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와 인스타그램용 사진 찍기 좋은 매장들에 밀려 점점 장사가 쉽지 않다.

이렇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던 두 부류가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와 소상공인의 언어는 북한 말과 남한 말 이상으로 달라서 커뮤니케이션이 제일 힘든 일이다. 좌충우돌하며 서로에게 서운한 일들도 생기지만 결국 마음과 마음은 통한다. 예술가들은 가게에 드나들며 손님을 관찰하고, 소상공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혼자 운영하는 매장에는 여러 가지 묵은 이슈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에 없어진 메뉴가 아직도 메뉴판에 있다거나, 간판에 조명이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신발을 밖에 진열했더니 햇빛 때문에 고무가 녹아버리기는 일도 있다. 짐이 늘어서 좁은 매장이 더 좁아졌는데 바쁜 와중에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보기 싫게 방치된 경우도 있다.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을 들은 예술가들에게는 더 이상 예쁜 그림을 그리거나 화려한 인테리어로 멋을 부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사장님의 오랜 불편함을 해소하고, 고객에게 쾌적함을 주는 것, 빠듯한 가게 운영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목표가 된다. 이것이 이 만남의 핵심이자, 인테리어 전문가가 아니라 사람과 사물을 관찰할 줄 아는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다.

예술가들은 낡은 곳을 깨끗하게 칠하고, 어울리는 벽화를 그려 공간에 생기를 더했다. 작은 수선집에 어지럽게 쌓여있던 실패들은 벽에 가지런히 걸 수 있게 선반을 달고, 지저분한 수납을 가리도록 가림막을 주문했다. 군데군데 불이 꺼져 있던 조명을 다시 밝히고,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어닝을 달았다. 메뉴와 가격이 바뀌어도 메뉴판 걱정이 없도록 자석으로 메뉴판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가게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꾸려가도록 로고와 유니폼을 제작하기도 했다.

예술가와 소상공인은 가게의 변화를 함께 목격한다. 예술가가 실행한 일 중에는 처음 해본 것들이 많다. 스스로도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있구나’ 하고 뿌듯해한다. 작업실 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능력과 경험이 키워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이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소상공인도 혼자 신경 쓰기 힘들었던 부분들이 해결되고 가게가 산뜻해졌다며 고마워한다. 해피엔딩이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