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바이러스와 공공재의 가치

입력 2020-02-20 04:04

미국 서부에 놓인 101번 고속도로는 캘리포니아주를 남북으로 길게 관통한다. 샌프란시스코만 안쪽에 자리 잡은 새너제이, 샌타클래라(실리콘밸리)를 거치고 올라와 ‘금문교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관통한다. 실리콘밸리와 인구 840만명의 샌프란시스코를 지나다 보니 극심한 교통정체를 빚기도 한다. 러시아워에 이 도로의 1차로는 ‘카풀 차로(carpool lane)’가 된다. 자신의 자동차에 다른 사람을 태운 통근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급행차로’다.

카풀 차로는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을 줄여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샌디에이고, 휴스턴 등 여러 도시에서도 운영한다. 나 홀로 운전자가 달리다 걸리면 무거운 벌금을 매긴다. 다만 이용권을 사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렉서스 차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렉서스 같은 고급 자동차를 타는 운전자들이 통행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카풀 차로 이용권을 구입해 꽉 막힌 옆 차로를 보면서 마음껏 달린다는 의미다.

렉서스 차로라고 비꼬는 이면에는 고속도로 혹은 카풀 차로라는 공공재를 시장에서 거래하고 새치기 권리를 부여하는 게 맞느냐는 반문이 자리한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교환되는 재화를 건드리거나 훼손한다”고 지적한다.

렉서스 차로 같은 형태의 공공재 훼손은 처음에는 부작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공재에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해 효율성을 높였다거나, 부수적 수익을 창출해 비용지출 일변도인 공공재 시장을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뭉칫돈을 투입해야 하는 데다 당장 필요도 없어 보이는 공공재에 계속 세금을 쏟아야 하느냐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한다. 공공의료서비스, 감염병전문병원, 검역 시스템이 그런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분야다.

하지만 공공재 훼손이 극단으로 달렸을 때 만들 결말이 무엇인지 지금 중국의 우한시가 보여주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인지 다른 병인지도 모른 채 병원 바닥에 누워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만연한 병원 내 감염, 병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고 집에서 공포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는 목숨, 공공보건·의료 시스템의 처절한 붕괴는 절망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보여준다.

5년 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사태 때 186명의 환자가 발생해 38명이 사망하는 등의 홍역을 치렀던 우리는 이번엔 비교적 잘 대응하고 있다.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손길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와 비교해 시스템은 달라졌을까.

중앙·권역별 감염병전문병원 설립은 제자리걸음이다. 확진자를 추적하는 역학조사관은 130여명에 불과하다. 코로나19 확진 환자를 격리해 치료할 수 있는 국가 지정 격리시설은 29개 병원의 198병상뿐이다. 공공의료기관 비중은 5.7%에 그친다. 공공의료기관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문재인정부에서 추진한 국립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 법안은 국회에 묶여 있다. 공공보건·의료라는 공공재에 ‘예산 퍼주기’ ‘재정 부담’ ‘혈세 낭비’ 같은 논리를 들이대면서 관련 예산을 삭감하거나 사업을 가로막은 결과다.

감염병이 급속하게 퍼지는데 정부의 검역·방역 활동은 없거나 미약하고 공공의료기관이 부족해 민간병원으로 환자가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철저하게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의료서비스를 사고팔다 보니 가난한 환자들은 집에서 혹은 길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마냥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닐 수 있다.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