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불어닥친 검찰 개혁 바람 속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화두는 ‘인권’이다. 형사사건 당사자의 인권보호가 앞으로 달라질 검찰에 기대되는 첫 번째 요소가 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의 인권 정책이 주목받은 것은 ‘피의자의 인권’ 때문이었지만 실제 사건에서 진정 보호가 필요한 것은 ‘피해자의 인권’다.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검찰도 법률상담, 심리치료, 신변보호 등 피해자 보호 영역을 넓혀가는 추세다. 과거 형사사건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만 부각되던 사회적 분위기가 피해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재판에 피해자 대신 참여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A씨에게 돌아온 건 끔찍한 보복이었다. 동거하던 남성은 A씨가 이별을 통보하자 흉기로 복부를 찔렀다. 2년 넘게 함께 살던 집에서 벌어진 범죄였다. A씨는 한순간에 ‘살인미수 피해자’가 됐다. 북한이탈주민인 A씨에게 한국의 수사기관이나 사법처리 절차는 낯설기만 했다. 무엇보다 법정에서 가해자를 마주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상황을 알게 된 검찰의 피해자지원담당관은 매 재판을 A씨 대신 출석하기로 했다. 범죄피해자를 위한 법정 모니터링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담당관은 재판이 끝나면 문자로 A씨에게 주요 내용을 전달했고, 심리치료를 위한 피해자지원센터도 연계해줬다.
A씨는 초기에 ‘8일간 치료해야 하는 혈복강 상해’에 대한 진단서만 제출했지만, 검찰청 범죄피해자구조심의위원회는 A씨가 대장 등에도 중상해를 입은 사실을 추가 확인했다. 이에 따라 A씨는 범죄피해구조금 650만원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구조금은 범죄피해자가 가해자에게서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할 경우 법무부와 검찰이 범죄피해자보호법에 근거해 지급하는 손해배상 개념의 보상금이다.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하는 과정에선 상해 정도가 중요하지 않았지만 최종 피해 정도를 고려한 조치였다.
관용차로 법정 출석
가정폭력 피해자인 B씨는 가해자가 재판에 넘겨진 뒤에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가해자가 찾아올까봐 원래 살던 지역에서 300㎞ 떨어진 곳으로 주거지도 옮겼다. 트라우마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재판을 받으려면 장거리를 이동해 법원에 출석해야 하는데, 공황장애를 앓으면서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졌다. 공판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B씨에게는 고통이었다.
B씨 사건을 담당한 공판검사는 피해자를 배려해 B씨 주거지 인근 법원에서 1회 공판을 진행할 수 있도록 재판부에 요청했다. B씨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검사가 법정까지 동행할 수 있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덕분에 B씨는 법무담당관과 함께 집 앞에서 관용차를 타고 법정에 출석할 수 있었다. 검찰은 B씨가 법정에서 증언할 때나 재판을 마치고 이동할 때에도 가해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치했다.
외국인 피해자도 예외 없어
외국인 사이에서 벌어진 형사사건도 지난해 4월부터 검찰의 피해자 지원 적용을 받는다. 베트남 국적인 C씨는 같은 국적의 남성을 만나 함께 생활했는데, 외도를 의심한 이 남성이 말다툼 과정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160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감당해야 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타지에서 당장 생활비를 구하는 것도 막막했다.
검찰은 범죄피해자보호법에서 정해진 범죄피해구조금 외에 피해 회복을 위한 경제적 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병원비, 심리치료비, 생계비, 학자금, 장례식 비용 등을 지원한다. C씨 역시 검찰청의 경제적지원심의위원회를 거쳐 치료비 1500만원과 긴급 생계비 150만원을 지급받았다.
생계비는 가족 수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데 최대 3개월, 특별 결의를 거치면 최대 6개월까지 지원 가능하다. 당시 검찰의 지원 사실을 알게 된 병원 측은 C씨를 위해 헌혈증을 모으고 치료비를 추가로 지원했다고 한다.
재원 확보·유관 기관 협력 필요
검찰에서 피해자 지원에 대한 지침이 처음 마련된 건 2004년이다. 대검찰청은 2008년 ‘피해자인권과’를 신설했고, 2010년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이 제정돼 경제적 지원을 위한 재원이 마련됐다.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인권보호 시스템이 운영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검찰이 범죄피해구조금 외에 실질적인 치료비 지원 등을 시작한 것도 불과 5년 전이다. 범죄피해구조금이나 경제적 지원은 모두 법무부가 관리하는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빠져나가는데, 범죄자들이 낸 벌금의 6%가량이 기금으로 적립된다. 대검 관계자는 “피해자 권리에 대한 인식이 강화돼 보호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며 “전체 벌금 규모는 오히려 줄고 있어 6%로 정해진 비율이 좀더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피해자 보호·지원은 범죄피해 직후는 물론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다각도로 이뤄진다. 작게는 ‘가해자의 출소 여부를 통지받겠느냐’고 묻는 절차 역시 피해자 지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지적장애를 가진 경우 후견인을 선임·청구하는 법률 지원도 마찬가지다. 한 검찰 관계자는 “범죄피해자들은 경황이 없고 지원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어 세심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원 방법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유관 기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대검 관계자는 “피해자가 민간이 운영하는 아동보호센터, 성폭력상담소 등 여러 기관에서 정보를 접하는 만큼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이어 “인권 취약계층인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