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버려진 것들에서 찾은 희망 메시지

입력 2020-02-15 04:04

검은 글씨들이 오선지에 매달린 음표처럼 철선에 걸려 있다. ‘Do not forget to smile(웃는 걸 잊지 마세요).’(사진) 글씨들은 초콜릿으로 쓴 것처럼 윤이 나고, 어떤 건 녹아내리기까지 했다.

조각가 심승욱(48)씨가 제작한 이 작품에 사용된 글씨 재료는 놀랍게도 폐비닐이다. 작가는 검은 비닐을 녹인 뒤 짤주머니에 넣어 반죽 짜내듯 글씨를 썼다.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에서 조각 기획전 ‘새벽의 검은 우유’전이 열리고 있다. 심 작가가 미술기획자 고동연씨와 공동 기획한 것인데, 낡고 버려진 것들을 가지고 자신만의 기법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 5명을 모았다. 도예를 전공한 뒤 독일에서 유학한 이세경(47) 작가는 드로잉을 내놨다. 연필로 섬세하게 일상의 풍경을 재현해놓은 듯하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가서 보면 연필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붙여서 만든 그림들이다. 머리카락 기증자를 인터뷰하고 대화에서 나온 소재를 가지고 그린 것이라 그림마다 내밀함이 있다.

같은 층에 전시된 두 작가의 작품이 선(線)적인 느낌을 공통분모로 한다면, 다른 층에서 선보이는 연기백(46), 정재철(61), 정현(64) 세 작가의 작품에선 덩어리감이 느껴진다. 연 작가는 오래된 집에서 나온 도배지를 커튼처럼 걸어놓는다. 커튼 사이로 한 가정의 사적인 역사가 도란도란 들리는 듯하다. 정재철 작가는 폐스티로폼을 쌓아놓았고, 정현 작가는 강원도 고성 산불에 숯처럼 꺼멓게 탄 나무 둥치를 가져다 놓았다.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이지만 미술관에 갖다 놓으니 조각 작품으로 변신해 각기 다른 느낌을 발한다. ‘검은 우유’는 프랑스 시인 폴 첼란의 시에서 딴 것으로, 죽음과 생명의 반복됨, 이에 따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용됐다. 3월 15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