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을 지킨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요즘처럼 힘든 때는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중립이라는 단어조차도 거추장스럽다. 그저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살고 싶은데 놔두질 않는다. 기자란 직업이야 원래 이쪽저쪽 모두에게 욕먹는 게 다반사니 익숙하지만 일을 떠나 한 자연인으로서 겪게 되는 상황은 퍽 당황스럽다. 사적 관계에서도 언제인가부터 어느 편이냐고 은근히 묻는 이들이 많다. 오랜 기간 많은 경험을 함께 나눈 이들도 그렇다. 굳이 정치적 논리로 묻지 않아도 될 얘기조차 진영 논리를 들이대며 힐난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매한가지다.
의견을 구한다 해놓고는 확인된 사실만 거론해도 반박부터 한다.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럴 때는 그저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무는 수밖에.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사는 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간단치 않다. 입 닫고 있는 건 저쪽 편이란 의미 아니냐며 손가락질을 한다. 가끔 만나거나 만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매일 마주쳐야 하고 대화해야 하고 의견을 나눠야 하는 관계라면 피곤해질 것이다. 그 상황이 국가의 일이 되면 피곤한 수준을 넘어 심각해진다.
국제관계는 급변하고 있다. 외교는 지난 몇 년 동안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더 이상 외교는 수사(修辭)로만 표현되지 않고, 커튼 뒤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수십 대의 카메라와 수백 명의 기자들 앞에서 저잣거리의 언어로 드러난다. “돈 더 내놔라” 혹은 “까불면 가만 안 둔다” 이런 식으로. 독특한 캐릭터의 최고 권력자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외교관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수하들도 흉내를 낸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 개별 관광 구상에 대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야 한다”고 훈수를 뒀다. 주재국 정상의 발언에 대한 대사의 언급에 볼멘소리가 나왔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문 대통령의 신임장을 받기도 전에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의 중국 후베이성 입국 금지 조치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의 건의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부적절한 간섭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현재 서울에 부임해 있는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 중국대사는 그들의 경력과 최근의 논란이 말해주듯 외교적 수사로만 요구를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본국의 이해관계를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강요하려 들 만한 인물들로 보인다. 함께 재임한 기간이 짧은 덕분에 아직은 두 사람이 같은 사안을 놓고 첨예하게 맞붙는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상황이 닥칠 개연성은 충분하다. 세계 곳곳에서 본국의 이해관계를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며 충돌하는 미국과 중국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처럼.
정부로선 중심을 잡고 원칙을 지키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들도 은근히,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어느 편이냐고 다그칠 것이다. 두루뭉술한 답을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무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익 중심의 변하지 않는 원칙을 세워놓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둬야 한다. 원칙을 세워 놓아도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으면 사안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 머나먼 나라의 장막 뒤에서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편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칫 그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돌이키기 어렵다. 얻어야 할 건 얻지 못하고 잃지 말아야 할 걸 잃게 된다. 이쪽저쪽 모두 비난을 쏟아낼 것이고 국민으로부터도 손가락질받게 될 것이다. 편들지 않고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정승훈 국제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