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살해한 사실을 기억 못 하는 치매 노인을 엄벌에 처하는 게 맞을까. 1심이 ‘잔혹한 범행’인 점에 초점을 맞춰 중형을 선고한 반면, 항소심은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판단해 집행유예와 함께 치료명령을 내렸다. “처벌보다는 피고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의 ‘치료적 사법’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10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씨(68)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과 달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아울러 집행유예 기간 동안 보호관찰을 받고 치매전문병원으로 주거를 제한한 상태에서 치료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치매 환자에게 치료적 사법 절차를 적용한 국내 첫 사례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치매 증상을 치료받고 있는 경기도의 한 병원을 직접 찾아가 선고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지난해 9월 A씨를 직권보석하고 치매전문병원에 거주를 제한해 치료를 받도록 해왔다. 통상 강력사건 피고인들은 수의를 입고 손목이 결박된 채 법정에 출석하지만, A씨는 흰색 환자복 차림으로 병원 직원이 끄는 휠체어를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최후진술에서 아들이 “할 얘기가 있느냐”며 재판부 대신 묻자 낮게 웅얼거리다가 “현실에 충실하겠다”고 짧게 답했다.
A씨는 2018년 12월 아내를 폭행하고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검찰이 징역 12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A씨가 이미 2013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인 점 등을 참작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검찰과 A씨 가족은 각각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항소심에서 A씨의 형은 대폭 감형됐다. 재판부는 “A씨는 범행 당시 치매 및 뇌경색으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한 능력이 미약한 상태였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A씨가 구치소 수감 중 찾아온 딸에게 “왜 엄마와 동행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등 중증 치매 증상을 보인 점이 유리하게 참작됐다.
재판부는 특히 A씨에 대한 치료 가능성을 강조했다. 앞서 재판부는 치료감호청구 가능성을 검찰에 문의했는데, “치매환자용 치료감호시설이 없어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었다. 재판부는 “시설이 없다는 현실에 안주해 실질적 치료가 어려운 교정시설에 있게 하는 건 부당하다”며 “피고인이 계속적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게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이라고 밝혔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