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신종 코로나) 사태는 중국 국가 통치 시스템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나 정보를 통제하는 전체주의사회의 특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질병 관련 컨트롤타워인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번 사태 발생 이후 중국을 노골적으로 감싸는 행보를 보이면서 국제기구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도 됐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지난 3일(현지시간) 집행이사회에서 “중국의 조치로 신종 코로나가 더 심각하게 해외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면서 중국을 칭찬했다. 확진자가 2만명을 넘어서고 사망자가 400명을 넘은 상황임에도 중국을 두둔한 것이다. 되레 그는 대중국 제한 조치를 비판했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지난달 중국 방문 때에도 시 주석의 조치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WHO 수장인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친중파로 유명하다. 선거 당시 중국은 10년간 600억 위안(약 10조원)을 WHO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그를 간접 지원했고 중국 외교관들은 개도국들의 표를 그에게 모아줬다. 중국 지원으로 당선된 데다 미국이 WHO 지원을 축소하는 상황에서 그가 자금줄인 중국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문제는 국제기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WHO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각종 국제기구 창설의 주역이었던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지원을 줄이거나 속속 탈퇴하면서 중국의 입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유엔 산하 16개 전문기구 수장 자리는 속속 중국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 덕분에 중국이 유엔 무대에서 영향력 확대라는 반사이익을 누린다”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내놓았다. 국제평화연구소의 제이크 셔먼 이사는 “중국은 권력 지위가 커짐에 따라 다자 시스템에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높아진 위상을 바탕으로 유엔에서 인권 관련 역할을 축소하거나 유엔을 ‘중국식 국가주도 자본주의’ 논리를 펼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오는 3월로 예정된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수장 선거에서 5번째 유엔 전문기구 수장을 배출할 꿈에 부풀어 있다. 현재 식량농업기구(FAO)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전기통신연합기구(ITU),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사무총장이 중국인이다. 신임 WIPO 사무총장 후보에는 10명이 올랐지만 실제 경쟁자는 중국의 왕빈잉 WIPO 사무차장과 다렌 탕 싱가포르 WIPO 청장으로 좁혀진다. 오랫동안 기구 내 2인자 역할을 수행해온 왕 사무차장은 개발도상국 회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등 서방은 지적재산권 침해로 악명 높은 중국이 WIPO를 장악하면 세계 지적재산권 질서를 크게 어지럽힐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의 마크 코헨 법률기술센터 소장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왕 차장이 당선되면 향후 10년 안에 시장 기반의 IP(지적재산권)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는 중국이 규칙을 정하는 IP 체제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