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맛이 있다. 단어마다 입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맛이 다르다. 나는 ‘벽’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혀가 단호해지는 것을 느낀다. ‘벽’을 입에 올릴 때마다 단단한 구조물이 혀 위에 올라가는 기분이다. 나는 ‘별’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 아련하게 풀어지는 혀를 느낀다. 아득한 곳에서 파리하게 반짝이는 천체를 혀끝으로 맛본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 어떤 이름으로 불린다 한들 장미향은 달콤할 텐데.” 하지만 빨간 머리 앤은 말했다. “만약 장미가 엉겅퀴나 돼지풀 같은 이름이었다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셰익스피어의 말이 맞는다. 우리가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 당당한 존재감과 우아한 향기가 변할 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앤의 말도 지지하고 싶다. 우리가 인식하는 장미의 아름다움은 그 장엄하면서도 여운 있는 단어를 혀끝에 올릴 때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장미가 가시겹꽃 같은 이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물론 가시겹꽃도 똑같이 아름답고 향긋하겠지만 우리가 그를 ‘장미’라고 부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5월 가시겹꽃 축제’라거나 ‘백만 송이 가시겹꽃’ 같은 말을 떠올려 보면 느껴지는 바로 그 차이 말이다.
말의 세계는 이처럼 미묘하다. 심지어 같은 실체를 표현하는 단어도 서로 다른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요즘 TV를 보면 출연자가 분명 ‘야채’라고 말했음에도 자막엔 ‘채소’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야채’라는 단어를 둘러싼 논쟁-일본식 한자어인가 아닌가-때문일 것이다. 내가 언어학자가 아니라 어느 의견이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언어 사용자로서 선명하게 느끼는 건 그 두 단어가 분명 다른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야채는 좀 더 작고 동글동글하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면 채소는 더 굵직하고 분방하고 야생적인 느낌이다. 야채라고 하면 나는 도마 위에 정갈하게 놓인 당근을 떠올리고 채소라고 하면 나는 밭에서 쑥 뽑힌 무를 떠올린다.
‘분홍’과 ‘핑크’ 역시 같은 컬러를 표현하는 단어다. 하지만 분홍에는 소박함과 정겨움이 있고 핑크에는 발랄함과 모던함이 있다. 사실 우리는 세련미에 있어서 외래어에 점수를 더 주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국어를 쓰는 입장에서 달가운 접근은 아니지만, 카피라이터로 광고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 풍조에 기대게 된다. 새 스마트폰의 컬러는 로즈핑크나 라일락퍼플로 명명되곤 한다. 판매량을 생각하면 누구도 꽃분홍 혹은 꽃보라라고 하지 않는다.
외래어조차 이따금 바뀌는 표기법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청소년기 한 배우를 알게 되고 그 충격적인 아름다움에 반해 이름을 찾아 외운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이름마저 문학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 바뀐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현재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다. 리어나도 당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인물 ‘헤르미온느’는 ‘허마이오니’가 원어에 가까운 발음이라고는 하나 많은 사람이 전자의 발음을 지지한다. 애초 그 이름으로 접한 탓도 있지만, 그 미묘한 말의 질감이 우리의 선호도를 결정했을 것이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 주인공을 나는 먼 옛날 ‘조나탕’이라고 표기한 책을 읽었다. 이 새는 시간이 지나 ‘조나단’이 되더니 언젠가 ‘조너선’으로 굳어질지 모른다. 이 세 새는 엄연히 다른 새 같다. 학창시절 배웠던 ‘요오드’라는 물질은 현재 ‘아이오딘’으로 불린다고 한다. 스포이트에서 방울방울 나오던 독특한 향의 누런 액체가 상당히 고급스러워진 기분이다.
나는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그리고 시인으로 글을 쓰며 섬세한 언어의 결을 감지하고 그 미묘한 말맛의 차이를 잘 활용하려 애쓴다. 말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오직 그 이유만은 아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다’. 황인숙 시인은 ‘말의 힘’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나는 말을 만져보고 핥아보는 과정이 짜릿하다. 다시 말하지만 말에도 맛이 있기 때문이다. 천 개의 단어에는 천 개의 맛이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언제라도 이를 맛볼 수 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