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문 위의 북어 두 마리

입력 2020-02-05 04:05

말린 명태를 북어라고 한다. 맥주 안주로 먹는 황태와 먹태도 북어의 한 종류이다. 이 북어는 제사상에 통으로 오른다. 펴서 올리기도 한다. 개업식이나 새 차 신고식 고사를 지낼 때도 오른다. 문 위에 북어를 실타래로 엮어서 걸어두기도 하였다.

고사에 쓰거나 문 위에 걸 북어를 고르는 기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릅뜬 눈이다.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눈꺼풀이 있는 놈도 있기는 있다)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으므로 밤에 도둑이나 악귀를 감시하는 데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북어를 걸어두는 것이라고 하는데, 눈알이 빠졌거나 흐릿하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입을 딱 벌리고 있어야 한다. 문 안으로 들어오는 복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식당을 나서다가 문 위에 실타래로 엮은 두 마리의 북어를 발견하였다. 한 마리가 아니라 쌍으로 걸려 있다는 것에 혼잣말로 “아, 쌍이네” 하였다. 그 얼마 전에 쌍어문(雙魚文)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까닭이었다. 당장에 어른들께 물었다. 문 위에 거는 북어의 마릿수에 대한 질문이었다. “한 마리였어요? 두 마리였어요?” 쌍으로 걸었다고 대답하는 분이 많았다. 내가 첫차를 샀을 때 고사를 지내고 보닛 안에 넣었던 북어도 쌍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문양, 즉 쌍어문은 고대 문명의 이동과 전파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신비의 코드이다. 쌍어문의 흔적을 쫓아 세계를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들은 한반도 고대 문명에 나타나는 쌍어문이 먼먼 어느 땅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 신앙에서, 티베트 원시 불교의 한 상징에서, 인도의 왕가 문양에서 발견한 쌍어문이 마침내 우리 땅의 가락국으로 이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식당 문 위의 북어 쌍어를 발견하고는 며칠을 이 생각으로 지내었다. 쌍어문이 고대 문명 이동 흔적인지는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만약에 문 위의 북어 두 마리가 쌍어문의 한 형태라면 그 쌍어문에 담긴 여러 상징이 우리의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북어 쌍어는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되지 않은, 실재의 물고기 두 마리가 걸려 있다는 점이 세계 여느 쌍어문과 다르다.

말린 생선 두 마리를 실타래로 엮어서 걸 것이면, 조기굴비, 민어굴비, 청어과메기도 된다. 바짝 말린 생선은 잘 썩지 않는다. 그런데, 북어와 다른 점이 있다. 조기, 민어, 청어 등은 짚으로 몸통을 엮어서 말리므로 등이 굽는다. 북어는 등이 굽어 있지 않다. 북어는 아랫입술에 줄로 꿰어 몸을 세워서 말린다. 몸통이 빳빳하니 살아 있는 놈 같다. 게다가 입을 딱 벌린 모양을 가지게 된다. 기왕이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고기가 쌍어문으로 어울린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또 하나, 문 위의 쌍어가 북어인 까닭은 북어가 흔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굴비나 민어를 걸어놓았다가는 누구 입에 들어갈지 몰라 불안해서 외려 인간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할 것이다.

쌍어문의 자료를 살피며 식당 문 위에 걸린 두 마리 북어에 대한 의미를 확장해보려고 시도하였다. 내 차 보닛에 넣었던 북어 두 마리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상징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쌍어문에 붙여놓은 문화상징이 워낙 고고하여 우리의 북어는 그 앞에서 초라하게 미끄러졌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쌍어좌의 생생한 기운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기를 바랐던 수도자의 치열한 정신도, 그 기운과 정신을 섞어 얻어낸 권력의 우아한 상징조작도 문 위에 걸린 북어 두 마리에서는 읽어낼 수가 없었다. 쌍어문은 손에 잡히지 않는 먼먼 저 세상의 신화를 말하고 있었고 우리의 북어 두 마리는 우리 코앞의 세상을 말하고 있었다.

“저거 왜 걸었어요?”

“응, 저거, 악재가 없대. 돈도 벌게 해주고.”

쌍어를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실재의 물고기로 걸었던 것은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꿈이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래오래 잘살 수 있게 먹을거리라도 충분하였으면 하는 소박한 희망이 문 위에 북어 쌍어로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북어 쌍어의 휑한 눈이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내게 다그치고 있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