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55·윤정희 사모)는 스무 살 철모르던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청춘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처녀 시절부터 장애아동들을 위한 엄마로 살았다. 충남 공주 동곡요양원, 중증 장애인들을 위한 보호시설인 이곳에서 연애도 결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애아동들을 씻기고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장인 장모님 영향이 큰 것 같다. 장인은 직업군인이셨는데 “나라가 너희를 위해 무언가 해주길 바라지 말고, 너희들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돼라”고 밥 먹을 때마다 말씀하셨다. 장모는 한발 더 나아가 “내가 배부르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며 “나만 배부르게 사는 삶을 살지 말라”고 하셨다. 아내는 이게 밥상머리 교육이란 걸 나중에 성장해서 알았다고 했다.
장인 장모의 영향으로 아내는 중학생 시절부터 ‘늘사랑아동센터’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결국 이 아동센터에서 우리 가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센터가 8남 3녀까지 가족이 확대되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나는 아내가 동곡요양원에 아예 눌러살면서 제대로 걷지도 달리지도 못해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돌볼 때 처음 만났다. 1991년 겨울이었다. 건설회사 현장소장으로 일할 때인데 여직원의 소개로 한 번 만나고 그다음엔 시설까지 찾아갔다. 아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정말 여기까지 오셨네요.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나는 “한번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쥬”하고 물었다. 아내는 아이들 곁에 있느라 느끼지 못했는데, 침 냄새였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이들이 흘린 침이 바닥까지 흘러서 시설 전체에 그 냄새가 뱄던 것이다.
우리는 92년 결혼했다. 이후 네 번의 유산이란 아픔이 있었다. 2000년 아동센터를 통해 세 살짜리 꼬맹이 하은이와 18개월 된 하선이 자매를 만났다. 가족이란 뜨거운 기쁨을 선물 받아 너무도 행복했다. 하선이는 입양 때부터 기침이 잦았는데 병명을 찾지 못하다가 2004년 서울대병원을 통해서야 폐쇄성 모세기관지염이란 걸 알게 됐다. 한쪽 폐를 쓰지 못하게 된 아이가 가녀린 팔뚝에 링거를 꽂고 “엄마 아빠, 이제 안 아파”하고 말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아내는 병원 비상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울면서 기도했다.
“제발 제 딸 하선이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살려 주세요.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그 어린애한테 어쩌면 이토록 가혹하십니까. 차라리 제가 대신 고통받을게요. 제 딸 하선이만 살려 주시면 제 신장이라도 내놓겠습니다. 신장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제 신장을 드릴게요. 제발 제 딸 좀 살려 주세요.”
기도는 응답받았다. 하선이는 조금씩 건강해져 깜찍한 초등학생이 됐고 3학년 운동회 때는 80m 달리기에서 6명 중 5등을 했다. 온 가족이 5등 한 하선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숨이 차 잘 걷지도 못하던 꼬맹이가 이젠 간호사가 돼 아픈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
아내는 서원대로 2007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연결된 부산의 생면부지 환자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왼쪽 옆구리 30㎝를 개복하고 열세 번째 갈비뼈를 잘라 한쪽 신장을 나눴다. 이미 네 명의 아이들을 입양한 후였다. 아내가 이러니 나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2009년 수술실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둘이 합쳐 신장 둘이 됐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