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통해 직권남용죄를 전보다 엄격하게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내면서 같은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유리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조 전 장관 측은 직권남용이 핵심 쟁점이 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의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치열한 법정 공방을 준비하고 있다. 반면 검찰은 이번 대법원 판시가 조 전 장관의 감찰 무마 사건에서 곧바로 적용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전체적인 취지로 볼 때 검찰 측의 입장에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2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조 전 장관 측과 검찰 측은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제시한 직권남용 판결 내용을 분석했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 성립한다. 다소 모호했던 직권남용의 개념을 재정의한 지난 대법 판결은 조 전 장관 측에게도, 검찰 측에게도 큰 관심이었다. 대법원은 이 가운데 ‘의무 없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법령이나 직무수행의 원칙 및 기준 등을 위반한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새로 제시했었다.
검찰이 지난해 12월 31일 조 전 장관을 재판에 넘긴 근거는 “민정수석의 직권을 남용,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을 중단시키고, 금융위원회의 유 전 부시장 징계를 막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청와대 특감반과 금융위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죄라는 의미다. 이에 대해 조 전 장관 측은 “특감반은 수사기관이 아니고 일종의 민정수석 보좌기관”이라는 입장을 폈다. 특감반은 수사 ‘권한’이 없고 비리 첩보 수집이나 사실관계를 확인할 ‘기능’만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감반원의 감찰·수사 권한이 법령에 명시돼 있지 않으므로 행사를 방해할 권리 자체가 없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 의무 없는 일의 해당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이번 대법원 판단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다. 조 전 장관은 오는 12일 첫 재판을 앞두고 서울대 82학번 동기이자 차장검사 출신의 김진수 변호사(법무법인 예강)를 선임한 상태다. 김 변호사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검찰 수사 단계부터 재판까지 변호한 인물이다.
검찰은 일단 법리적으로는 대법 판시가 조 전 장관의 유 전 부시장 감찰 무마 사건에 곧장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애초 검찰의 공소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행위가 아닌 ‘권리행사’를 방해한 대목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 후 검찰 내부에서도 “‘권리를 방해한 것’으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서는 영향이 없다”는 보고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오히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와 관련해 검찰 측 입장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놨다고 본다. “김 전 실장 등의 예술위원회 지원배제 행위가 관계법령상의 의무를 위반한 이상 직권남용이 성립된다”는 점이 분명해졌고, 이는 그간 검찰이 제기해온 문제의식과 같은 맥락이라는 해석이다.
검찰은 특감반의 감찰 중단, 금융위의 감찰·징계 미실시가 청탁에 따른 것으로서 국가공무원법 및 대통령비서실 직제를 위반했다고 공소장에 이미 적시했다. ‘기획재정부 직무관련범죄 고발 세부기준’은 공무원이 직무와 무관한 금품을 수동적으로 받았더라도 1000만원 이상이면 반드시 고발토록 한다. 유 전 부시장은 4950여만원을 수뢰해 구속 기소됐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