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강릉아산병원에서 원목으로 섬기고 있지만 나 김상훈은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 아니다.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한 전문 엔지니어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작은 토목회사에서 일하며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삶을 살았고 몇 년 만에 현장을 책임지는 소장이 됐다. 충남 천안 요금소 확장 공사를 시작으로 충청도 쪽 도로 공사를 도맡았다. 현장 일이 하나 끝나면 인건비 자재비 회사 수수료를 제하고도 통장에 많은 현금이 남아 있었다.
외환위기 당시 많은 건설사가 줄줄이 도산했다. 나는 그런 회사에서 진행하던 다 무너져 가는 토목 현장에 들어가 일했는데, 신기하게도 부도가 난 현장이지만 사업이 무사히 마무리되는 기적을 연이어 경험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현장도 내가 맡으면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 아내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 줬다. 통장에 적지 않은 돈도 들어있고 집도 여러 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내는 주님께 십의 오조를 드리며 감사해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바르지 못한 결정이나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주님께 부끄러웠다. 수요일은 현장을 4시 정도에 마무리하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금요철야예배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금요일도 현장을 일찍 정리했다. 어느 틈엔가 예배가 내 마음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교회 안에서 사는 삶이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러던 중 일곱 살 된 둘째 하선이가 갑자기 심한 열로 입원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입양 후에도 자주 아프던 하선은 이때 폐쇄성 모세기관지염 진단을 받았다. 두 개의 폐 가운데 하나가 새까맣게 변했고, 나머지 폐의 반 이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열 살 이전에 이 병에 걸리면 사망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의료진은 가망이 없다며 기다려 보자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이 상태에서 뭘 더 기다리라는 건지 너무도 답답해하며 주님께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하선이를 살려 주시면 목사가 되겠습니다. 토목 사업을 모두 던져 버리고 물질도 던져 버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목회자의 길을 걷겠습니다.”
하선이는 나머지 폐로 건강하게 자라나 강릉아산병원 간호사로 일 하게 된다. 나는 서원 그대로 목원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나이 50에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쉰 살에 안수받으면서 누구나 다 살아가는 목사로 살지 마슈. 인생 한 번 사는 거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 같은 거 안 받아두 돼유. 우리가 존경 받을려고 목회자 가정으로 사는 거 아니니께. 다만 기독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목회자 가정으로는 살지 맙시다.”
아내의 이 말이 어찌나 무섭던지 지금도 가슴 안에 담아 두며 살고 있다. 어쩌다 마음 편히 지내고 싶을 때도 아내가 어디선가 이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하나님 욕 먹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가슴으로 낳은 열한 명 아이들과 함께 걸어왔다. 든든한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온 길이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