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직권 남용 엄격히 해석한 대법원 판결 주목된다

입력 2020-01-31 04:03
대법원이 직권 남용죄의 범위를 보다 엄격히 해석한 판결을 내렸다. 그간 공직자에 대한 사법처리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던 직권 남용 혐의에 대해 남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환기한 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 판단을 내려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들은 박근혜정부 시절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나 예술가 명단을 작성토록 지시하고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토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이들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 각종 명단을 송부하게 한 행위 등이 직권 남용에 해당하긴 하지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으로 판단한 원심에는 법리 오해와 심리 미진의 잘못이 있다고 봤다.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상호 협조를 거쳐 이뤄지는 게 통상적이므로 요청을 청취하고 협조하는 등의 행위를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직권 남용죄는 공무원이 권한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하는 것으로 형법 123조에 규정돼있다. 법조계에서는 ‘직권’ ‘남용’ ‘의무’ 등 법조문 상 용어가 모호해 법적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제기해왔다. 헌법재판소는 2006년 직권 남용죄의 명확성 문제와 관련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소수의견을 통해 “공무원의 직권은 내용과 범위가 언제나 법령의 규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명확히 확인되는 것으로 볼 수 없어 직권 남용의 적용 범위가 사실상 무한정 넓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앞으로 공직자에 대한 수사나 기소에서 직권 남용 혐의를 적용할 때 보다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게 됐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의 판결에도 영향이 미칠 전망이다. 일차적으로는 유재수 전 부산 경제부시장에 대한 특별감찰을 무마시킨 혐의로 기소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 사건이 관심을 끈다. 같은 혐의가 적용된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이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등 ‘적폐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도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