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서 지구인이 된 기분입니다”

입력 2020-01-30 17:55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부부 여행 작가 백종민(오른쪽)씨와 김은덕씨.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한 달 살기는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며 “당장 다음 달엔 베트남 하노이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윤성호 기자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광고 카피로 익숙한 저 문구를 마주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숨부터 내쉴 것이다. 장기 휴가를 떠나는 게 언감생심인 한국 사회에서 ‘살아보는 여행’은 많은 이들에게 불가능한 여행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분위기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휴직자나 프리랜서를 중심으로 이른바 ‘한 달 살기 여행’(이하 한 달 살기)을 통해 ‘살아보는 여행’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서다. 한 달 살기는 유명 관광지에 집착하거나 현지 맛집을 탐방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여행지의 ‘진짜 삶’을 체험하는 ‘진짜 여행’이다.


최근 서점가에 등장한 ‘여행 말고 한 달 살기’(어떤책)는 한 달 살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요긴한 참고서가 될 만한 신간이다. 한 달 살기의 매력부터 숙박 문제 해결법, 값싼 항공권을 구하는 방법, 한 달 살기에 필요한 앱까지 다양한 정보가 빽빽하게 실려 있다. 저자는 부부 여행 작가인 백종민(40)씨와 김은덕(39)씨. 2012년 백년가약을 맺은 두 사람은 이듬해 4월 쿠알라룸푸르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총 26개국 36개 도시에서 총 40회나 한 달 살기를 체험했다.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난 부부는 “한 달 살기를 처음 떠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며 “우리가 겪은 좌충우돌의 시간을 독자들은 겪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한 달 살기를 추천하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①오버투어리즘(관광객이 몰려 원주민의 삶이 파괴되는 현상)의 대안이 될 수 있다. ②나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 ③세상은 넓고, 우린 서로 다를 뿐임을 이해할 수 있다. ④일상의 체력으로 충분하다. ⑤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①~⑤번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④번과 ⑤번이다. 한 달 살기는 일정에 쫓기지 않으니 체력적인 소모가 덜하다는 게 부부의 주장이다. 경비의 경우 부부는 일반적으로 생활비로는 1000달러, 숙박료로는 500달러 정도를 각각 썼다고 한다.

한 달 살기에 나서면 엄청난 짐을 꾸려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부부는 그간 각각 20인치 기내용 캐리어에 노트북 가방만 하나씩 걸머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책에 소개된 한 달 살기 준비물은 다음과 같다. 1인용 전기밥솥, 전기요, 전기 모기약, 돗자리, 구급약…. 이들 물품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역시 전기밥솥인데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30일치 햇반을 챙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이 밖에도 책에 담긴 인상적인 정보는 한두 개가 아니다. 가령 한 달 살기에 나서면 그 지역의 도서관을 자주 찾는 게 좋다. 현지인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나 행사 정보도 얻을 수 있어서다.

부부는 그간 여행책을 내고 강연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야금야금 돈을 모아 한 달 살기에 나서곤 했다. 주야장천 붙어 지냈으니 다툰 적이 많았을 건 불문가지다. 두 사람은 “한때는 귀국하면 갈라서려고 여행지에서 이혼 서류를 쓴 적도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40회에 달하는 한 달 살기의 경험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둘은 “‘한국인’에서 ‘지구인’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세계의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지구가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고민하게 됐죠. 아마 한 달 살기가 아니었다면 이런 변화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한 달 살기는 시간만 있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여행이에요. 그걸 많은 분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요.”(김씨)

“얼마 전에 저희 부부의 새해 인사를 영상으로 촬영해 그동안 여행하면서 만난 외국 친구들에게 보냈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어색한 한국어를 써 가면서 영상 답장을 보내주더군요. 세계 곳곳에 작은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거죠. 한 달 살기가 힘들다면 ‘2주 살기’를 통해서라도 현지인들과 어울려본다면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백씨)

책의 말미에는 부부가 경험한 한 달 살기 여행지 31곳(너무 멀어서 독자들이 도전하기 힘든 지역은 뺐다고 한다)의 순위표가 등장한다. 각 도시의 대중교통 문제, 즐길 거리의 규모, 음식이나 숙소의 수준 등에 별점을 매겨 1~31위를 정리한 순위표다. 참고로 1위를 차지한 곳은 빌바오와 바르셀로나, 꼴찌인 31위는 만달레이 에든버러 롬복 더블린이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