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기록의 미덕

입력 2020-01-30 00:02

새해가 되면 늘 새 다이어리를 산다. 선호 브랜드가 있는데 이제는 찾기 쉽지 않아 적잖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대세지만 나는 여전히 손글씨로 일상의 계획과 생각을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일정 정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게 다이어리는 삶의 흔적을 기억하게 해주는 시간여행 통로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책상 서랍엔 수십 권의 다이어리가 빼곡하게 쌓여있다. 가끔 시간이 나면 지난 다이어리들을 열어본다. 그 안에는 만났던 사람과의 추억과 내가 해온 주요 작업 과정, 그 순간 느꼈던 생각의 자취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저 흩어져 버렸을지 모를 순간들이 기록으로 의미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된 것이다.

‘고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는 평생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증언으로 유명하다. 조지 뮬러의 기도가 위대한 건 그에게 어떤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삶에서 기도한 모든 순간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험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쌓여 이뤄진 거대한 자취다. 오랜 시간의 수련과 체험이 쌓이면 현재 시점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수’로 남는 법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기록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삶의 연대기를 지금의 기억에 의존해 정리해보자. 과연 몇 페이지나 쓸 수 있을까.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의 파편은 대부분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간다. 오직 기록된 것만이 내 자취를 증명해준다. 역사 작업에서 당대 현장 인물과의 인터뷰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해당 인물의 기억이 역사 서술의 가장 큰 맹점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억보다는 기록을 더 중요하게 취급한다. 기록된 기억만이 그때 그 자리에서 있던 일을 보존하는 최선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사진도 중요하지만, 생각을 기록한 문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의 영감까지 담아내기에 더 소중하다.

서양 학문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전통에서 앎이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식론적 이해를 추구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은 ‘신은 어떤 존재인가’(Who God is)라는 대명제의 객관적 이해가 정리된 결과물이다.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앎은 ‘신이 하신 일’(What God has done)에 대한 역사를 중시한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신에 관한 지식의 부재가 아니다. 그분이 내게 행한 일을 망각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히브리 전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도할 때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며 민족의 역사를 상기한다. 신의 부재를 느끼는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역사 속의 하나님을 기억했기에 이들은 신앙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명절 아침 가족 예배에서도 우리는 앞서가신 어르신의 신앙과 삶의 종적을 기억한다. 나 역시 이번 설날 아침 “할머니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을 부르며 가족과 의미 있는 기억을 나눌 수 있었다. 여기선 그분들이 남긴 기록이 중요한 매개가 된다. 할머니가 남긴 성경책과 아버지가 썼던 옛 서적을 함께 읽고 나누면서 산 자와 망자가 함께하는 초대교회의 카타콤 예배와 코이노니아를 재현할 수 있었다.

현실의 꼼꼼한 일정관리뿐 아니라 10년 뒤 나의 삶의 지혜를 위해, 또 내 자녀가 부모의 삶을 기억할 수 있도록 생각과 삶의 여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시작해보자.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김구의 ‘백범일지’, 다윗의 ‘시편’처럼 나의 솔직한 기록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지혜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내 다이어리를 딸에게 전할 생각이다. 이 기록들이 적어도 내 자녀에겐 꽤 중요한 믿음의 유산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윤영훈(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