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우매함과 오만

입력 2020-01-29 04:02

능력은 없고 착하기만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능력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사람은 마음껏 욕할 수 있지만 능력은 없어도, 능력이 없을 뿐 착하기만 한 사람을 양심의 가책 없이 욕하기는 쉽지 않다.

이 말속에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있다. 일보다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읽을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능력의 한계 때문에 마땅한 성취를 이루지 못할 때 나무라지 않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잘 해내라고 응원하게 된다. 안타까움과 응원에는 기본적으로 애정이 전제되어 있다. 이 애정은 행위자의 착함에서 비롯한 것이지 (무)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의 능력에 대한 반응은 인정이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을 인정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능력 있는 사람이 사랑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그가 받는 사랑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요소 때문이다. ‘능력도 있으면서’, 또는 ‘능력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런데 일은 못해도 착하기는 한 줄 알았던 사람이 착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어떤 계기를 통해 알게 될 때, 그가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이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착하지 않아서, 즉 선한 의도가 있지 않아서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사람이 일을 잘 못할 때 안타까워했던 만큼 실망하고, 그 사람이 잘 해내도록 응원했던 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깊이 안타까워한 사람은 깊이 실망하고, 많이 응원한 사람은 많이 배신감을 느낀다.

가장 나쁜 것은 이 능력 없는 사람이 자신의 선하지 않은 의도를 숨기지 않는 경우이다. 대개의 경우 떳떳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사람은 그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아직 남은 착함의 증거이다.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감추고 부끄러워함으로써 착함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사람들이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몰래 하거나 하고서도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동원해서 변명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착하지 않음을 감추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람은 왜 그러는 것일까. 자신의 나쁜 의도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사람의 의도는 무엇일까. 몰래 하지도 않고 발뺌하지도 않고 변명하지도 않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 그처럼 뻔뻔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 신념에 대한 과도한 확신과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시를 떠올릴 수 있다. 전자는 실은 우매함이고, 후자는 오만이다.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믿는 것 외에는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을 때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춘다. 멈춘 사람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가 멈춰도 나아가므로 멈춘 그가 보는 것은 이제 진짜 세상이 아니다. 그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사실을 보지 못하면서도 자기가 보는(보았던) 것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혀 무슨 말인가를 할 때 그가 하는 말은 궤변과 요설이 된다.

우매함은 능력이나 지식과는 다른 문제이다. ‘옥중서신’의 신학자 본회퍼는 우매함을 지적 결함과 구별해서 말했다. 그는 지적으로 대단히 영리하면서도 우매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지적인 사람의 우매함이 사악함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그의 통찰이 옳다는 것은 궤변과 요설을 늘어놓는 이른바 지적인 사람들에 의해 증명된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악인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매한 자는 감정이 상하면 쉽게 공격성을 띠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또 다른 요소인 오만 역시 우매함과 무관하지 않다. 오만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으므로 그의 오만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타인이 자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능력이 없으면 착하기라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착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착함의 덕을 도태시키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