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4%로 1965년 통계 집계 이래 역대 최저치다. 최근 몇 달 새 물가 동향이 발표될 때마다 저물가에 따른 디플레이션(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동반하는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정작 소비자들은 저물가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고 한다. 설 연휴를 앞두고 장보기가 무섭다는 말까지 나온다. 왜 체감물가는 다른 걸까.
정부가 가격 변동을 챙기는 460개 품목의 전체적 가격 동향과 서민 실생활과 관련된 품목들 가격이 다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은 460개 품목의 가격 변동을 매월 서울 등 38개 지역에서 조사한다. 이렇게 정리한 품목별 가격 변동치를 바탕으로 소비자물가지수를 산출한다. 단, 변동치들을 단순 합산하지 않고 항목별 가중치를 곱한다. 그러다 보니 특정 품목의 물가가 많이 뛰었어도 가중치가 높지 않으면 전체 소비자물가지수에 변동폭이 적게 반영된다.
국민일보가 22일 국가통계 포털 ‘코시스’를 통해 확인한 정부의 명절 전 중점관리 품목 32개의 최근 6개월간 변동 추이에는 이런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2개 품목의 가격 동향은 전체 소비자물가지수와 다르게 움직였다. 통계청은 해마다 설 연휴와 같은 명절을 앞두고 사과 배 밤 돼지고기 등 명절 성수품, 밀가루 식용유 소주 맥주 등 명절 이용 빈도가 높은 가공식품 같은 32개 품목을 중점관리 품목으로 지정한다. 중점관리 품목의 물가 동향을 파악해 관계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한다. 다만 언론에 공표하지는 않는다.
코시스에 등록된 품목별 소비자물가지수 증감 추이를 보면 32개 품목 중 하나인 무 가격은 지난해 12월 전년 동월 대비 98.2%나 치솟았다. 같은 달 배추 가격도 60.8%나 올랐다. 12월 전체 소비자물가지수 증가폭이 0.7%에 불과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지난 6개월 사이 정부의 중점관리 품목 가운데 국산 쇠고기, 수입 쇠고기, 갈치, 밀가루, 두부, 소주(소매가격), 소주(외식가격), 맥주(소매가격), 맥주(외식가격) 등 9개 품목의 물가는 꾸준히 상승세를 기록했다. 지난해 8월 전체 소비자물가지수가 보합세를 기록하고 9월에 0.4% 줄었던 것과 상관없이 오름세를 이어간 것이다.
물론 같은 품목이라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물가 동향은 널뛰기하기도 한다. 무는 지난해 7~9월만 해도 1년 전보다 각각 27.5%(7월), 54.4%(8월), 45.4%(9월) 떨어졌었다. 배추 역시 같은 기간 9.8%(7월), 42.1%(8월), 16.7%(9월) 내렸다. 그러다가 지난해 10월 들어 배추 가격은 66.0%, 무 가격은 11월 들어 67.4%나 껑충 뛰었다. 통계청 관계자는 “2018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태풍과 잦은 비의 영향으로 생산량이 줄어 배추와 무 가격이 폭등했던 것의 기저효과다. 그래서 지난해 마이너스 물가가 이어졌다”며 “김장철이 시작되면서 가격이 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명절 성수품들은 줄곧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다 연말에 회복됐다. 밤 가격은 지난해 8월 -15.9%를 시작으로 줄곧 마이너스 물가를 보였다. 12월에야 4.1% 올랐다. 돼지고기 가격도 7월부터 감소세를 이어오다 12월 들어 2.8% 증가했다. 휘발유와 경유 가격도 7~11월 감소세를 보이다 12월 들어 각각 6.3%, 3.2% 상승으로 돌아섰다. 그나마 명절 성수품인 사과 배 조기, 생필품 성격이 강한 양파 마늘 등의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는 건 소비자들에게 위안거리다.
생활 체감물가와 지표물가의 괴리는 과거 이명박정부 때도 논란을 불렀었다. 이명박정부 초기인 2008년 3월 정부는 서민생활 안정을 내세우면서 52개 폼목을 집중 관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른바 ‘MB물가’라 불리는 물가지수가 탄생한 것이다. 정부의 집중 관리에도 불구하고 그해 연말까지 52개 품목 가운데 우유(36.1%) 밀가루(31.8%) 등 18개 품목의 물가가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이며 치솟았다. 당시 전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4.7%였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