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괴를리츠 공원 가보니
독일 영토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작센주의 고도(古都) 괴를리츠. 40여m에 불과한 알슈타트 다리를 두고 독일과 폴란드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국경도시로서의 짧았던 부흥기를 뒤로한 채 지금은 면적대비 인구밀도가 적어 ‘유령도시’ ‘죽은 도시’로 불린다.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곳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도 있다. 베를린의 동남쪽 외곽에 자리 잡은 괴를리츠 공원이다.
지난 14일 찾아간 이곳은 공원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새어 나왔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차림으로 은밀하게 뭔가를 주고받는 사람들, 드럼통 속 각목 몇 개에 불을 지핀 채 연신 손에 든 술병을 부딪치는 사람들. 공원은 이름뿐 아니라 괴를리츠에 붙여진 수식어와도 닮아 있었다.
“마약을 거래하는 사람들이지요. 이곳에선 흔한 일입니다. ‘고스트 공원(유령공원)’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공원 한편 그라피티(건물 벽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를 이용해 그린 그림)로 치장한 유스 센터(Youth center)에서 나온 프리츠 블란도프(가명·58) 목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건물 안 작은 사무실엔 추위를 피해 도움을 요청하러 온 마약중독자가 상담을 받고 있었다. 중독자의 어깨를 토닥이며 차를 건넨 블란도프 목사는 “수천 명이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중 수백 명은 웃으며 살고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며 미소를 지었다.
센터에선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약 알코올 도박 중독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소개하고 심리 상담도 한다.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의류 나눔, 취약계층 청소년을 위한 놀이 공간 및 식료품 지원도 수시로 이뤄진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아랍권 민주화운동, 시리아 내전 등으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이곳을 찾는 난민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블란도프 목사는 “불법체류 상태인 난민 중 중독의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상당수”라며 “이들을 위한 치료지원, 법률 상담, 독일어 교실 운영 등으로 사역이 더 분주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독으로 관계가 깨진 이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생의 혹독한 순간을 지나고 있는 중독자들의 울부짖음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건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분노와 파멸로 가득 찼던 과거를 고백했다.
그는 48년 전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충격에 빠진 10살 소년은 방황의 길을 걸으며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17세부터 헤로인에 손을 댔고 3년 만에 가슴과 폐, 뇌가 차례로 망가졌다. 아들의 방황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심장병을 얻었다. 거리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그에게 한 간호사가 전한 복음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처절한 회개가 뒤따랐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같은 몸을 망가뜨린 자신을 돌아봤다. 그길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거리에서 중독자 재소자 홈리스들을 만나며 27년째 회복을 돕고 있다.
유스센터를 나와 인근 카페에 들어서자 고소한 빵과 커피 향기가 진동했다. 식탁을 둘러싸고 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독일어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센터에서 중독 치유 과정을 보내며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 매주 세 차례 갖는 자조모임이다. 이곳에서 스태프로 활동한 지 일주일째인 소피아 필피치(21)씨도 불과 1년 전까진 거리 위에서 비틀거리며 위태로운 삶을 살았다.
“13살 때부터 헤로인에 빠졌어요. 가출 후 주린 배를 채우려 도둑질을 하고 도시를 배회하다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어요. 소망도 희망도 없었죠.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얼굴에 피어싱을 수십 개 박으며 저항감을 표출했어요. 그렇게 삶이 망가져 가고 있을 때 유스센터를 접했고 제가 가치 있는 존재란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알아요. 하나님이 날 만드신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블란도프 목사는 “외부에서 바라보기에 독일의 사회보장시스템이 매우 촘촘하게 구성돼 있을 것 같지만 사각지대가 많다”며 “그 빈 공간을 메워주는 게 교회”라고 설명했다. 이어 “각 지역마다 교회들이 힘을 모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기관을 세우고 사회보장시스템에 편입돼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친다”며 “독일 전역에 교회가 운영하는 중독자 전문상담소와 돌봄시설이 3000곳 이상”이라고 덧붙였다.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블란도프 목사는 한국의 자살 중독 문제에 대해서도 조언을 전했다. 그는 “한국 사회엔 경제적 성공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이들이 패배의식에 젖어있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될 때 생명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몸을 파괴하면서까지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실의와 중독에 빠진 이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은 ‘사랑’에 있다”며 “교회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특화된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베를린(독일)=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