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으로 복음 지킨 신앙 선배들 흔적 앞에 소명 되새겨”

입력 2020-01-21 00:01
전국 9개 신학대, 신대원 대표로 구성된 순례단이 지난 10일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신앙으로 인해 책망받았던 터키 라오디게아 교회 터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터키·독일 등 종교개혁지 순례 나선 9개 신학대·신대원 학생대표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 떨어진 아나톨리아 고원. 그 중심부에 자리 잡은 카파도키아는 기암괴석이 밀집돼 1985년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동시에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찾아든 초기 기독교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한 크리스천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기암괴석에 구멍을 내고 지하 55m 깊이의 은신처에서 삶을 일궜던 흔적이 데린쿠유(Derinkuyu)란 이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9일(현지시간) ‘깊은 우물’이란 뜻의 데린쿠유 입구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어두운 길이 나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지하로 한 걸음씩 내려가자 작은 동굴 수백 개를 연결해 놓은 듯한 지하도시가 펼쳐졌다. 평균 수명을 30여년으로 단축할 만큼 물도 공기도 부족한 공간.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려 300년을 머물렀던 삶의 터전이었다. 한쪽 낡은 전등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무리의 사람이 보였다.

“오직 복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 가운데 이름도 빛도 없이 삶을 희생했던 신앙 선배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최영섭 인천 마을안교회 목사)

‘삼십분의 일 운동본부’ 주관으로 11일간 기독교 성지 및 종교개혁지 순례에 나선 전국 9개 신학대 신대원 학생대표 19명이었다(국민일보 2019년 11월 28일자 37면 참조). 이들은 지난 6일 한국을 출발해 터키 체코 독일에 남아있는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테제의 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 아래쪽은 순례단이 지난 9일 터키 카파도키아에 위치한 데린쿠유에서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켰던 초기 기독교인들을 떠올리며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순례에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학교별 총학생회와 원우회의 전·현직 임원들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에페수스 유적지, 얀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레헴교회, 95개조 반박문이 공표된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크성 등을 차례로 탐방하며 예비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담금질했다.

머리로 그려보기만 했던 현장을 직접 보고 만질 때마다 수시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가 순례단이 받은 감동을 가늠케 했다. 더 큰 감동은 하루를, 연합을 향한 메시지로 시작하고 순례 여정의 여운을 내려놓으며 끝맺는 자리에서 나왔다.

“한국교회 분열의 아픔을 가진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힘써 지키기에 앞장선다면 분명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마음을 나누게 하기 위함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하신 이유일 겁니다.”(최윤철 침신대 직전 총학생회장)

“95개조 반박문을 보며 나와 다른 교단과 신학을 정죄하던 과거 모습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형제와 자매임을 잊지 않고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더욱 뜻을 모으는 우리가 되길 기대합니다.”(신지은 고신대 여원우부장)

이들은 매일 여정을 시작하는 버스 안에서 돌아가며 설교자로 나섰다. 여정을 마친 뒤에는 그날의 체험과 감동을 나눴다. ‘전도사’란 직함을 내려놓고 형 누나 오빠 동생으로 묶인 이들의 교제엔 멈춤이 없었다. 이동하는 버스와 비행기 안, 끼니마다 얼굴을 맞대는 식탁, 잠자리에 들기 전 숙소 안에서도 사역자로서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의 벽을 허무는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박상수 협성대신대원 원우회 총무는 “솔직히 출발 전까지도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맘이 앞섰는데 기우에 불과했다”며 “여정 중인에도 한국에서 가질 다음 모임이 벌써 기대된다”며 웃었다.

최영섭 목사는 “12년 전 삼십분의 일 운동을 시작할 땐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 학교나 교단 내 모임이 아니라 초교파적으로 모인 예비 목회자들이 순례지에서 삶과 신학을 교류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그는 “교회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회에서 부정의 아이콘이 돼 가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다음세대의 연합이 회복을 향한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속적 연합운동으로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한 합의도 도출됐다. 전국신학대 학생대표단 활동을 펼쳐나가는 데 힘을 모으기로 하고 ‘전국신학생선행실천대회’ ‘연합기도회’ ‘연합 MT’ 등을 논의하기 위해 다음 달 중 공식 모임을 열기로 했다.

유환영 감신대 총대학원회장은 “가장 어두울 때는 가장 밝을 때를 예비하는 시간”이라며 “학교로 돌아가 순례에서 얻은 교훈과 감동을 학우들에게 오롯이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본부는 앞으로 국내 신학대, 신대원이 모두 동참할 수 있도록 사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터키·체코·독일=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