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종신권력 시동… 헌법 뜯어고쳐 ‘실세 총리’ 노린다

입력 2020-01-17 04:02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차기 총리로 지명된 미하일 미슈스틴 연방국세청장과 마주 앉아 있다. 푸틴 대통령의 눈초리가 날카로운 반면 미슈스틴 총리 지명자는 주눅든 표정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 후임으로 지명된 미슈스틴 청장은 16일 의회에서 임명안이 통과될 전망이다. TASS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종신 독재체제 수립을 향한 발걸음을 뗐다. 푸틴 대통령이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을 제안하자 러시아 내각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기다린 듯 총사퇴하며 길을 터줬다. 푸틴 중심 러시아 집권세력의 권력 연장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더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15일(현지시간) 자신을 포함한 러시아 내각이 총사퇴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에서 내놓은 개헌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다. 푸틴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에 집중된 권력을 의회로 대폭 이양하는 것이다.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총리와 장관 선출 권한을 의회로 옮겨 실권이 대통령에서 총리로 이동하도록 했다.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고 있는 러시아 헌법상 푸틴은 2024년 퇴임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의회에 권한을 이양해 대통령 퇴임 후 실세 총리 등의 형태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직책만 바뀐 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푸틴의 권력 연장 꼼수는 처음이 아니다. 2000~2008년 4년 임기 대통령직을 연임한 그는 3연임 금지 조항에 막히자 총리가 됐고 최측근인 메드베데프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메드베데프 정부는 ‘상왕 푸틴’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정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푸틴은 201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해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대통령직에 복귀했고 매드베데프를 총리에 임명했다.

첫 번째 꼼수와 이번 개헌 추진의 다른 점은 통치 자문기구인 러시아 국무원의 권한 강화다. 러시아연방의 지역 지도자 등으로 구성된 국무원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효율적인 기관”이라며 헌법 개정을 통해 국무원의 지위와 역할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국무원은 대통령 퇴임 후 푸틴이 군과 외교 영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유지하도록 돕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전례도 있다.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모델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29년 장기 집권 후 지난해 3월 퇴임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국가안보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늘린 후 자신이 종신 위원장에 오르는 방식으로 독재를 공고화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푸틴 대통령이 ‘카자흐 모델’을 따라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푸틴은 메드베테프 총리 후임으로 국세청장인 미하일 미슈스틴을 지명했다.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내세워 권력 분산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러시아 하원은 16일 푸틴 대통령이 제출한 미슈스틴 총리 임명 동의안을 표결해 찬성 383표, 기권 41표로 가결했다.

푸틴은 2012년 재집권 후 내부 불만이 높아지고, 경제 침체가 길어지자 책임을 외부 가상의 적으로 돌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러시아 최대 위협으로 규정했고, 유럽연합(EU) 등 서방 세계는 분열시킨다는 전략을 유지해 왔다. 실제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 등 러시아의 개입이 있었다고 의심받는 일련의 사건들은 서구 통합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CNN은 “푸틴의 힘이 러시아에서 확대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푸틴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더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