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여객기 피격’ 사건의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진상규명을 둘러싸고 이란 내에서 온건파와 강경파 간 갈등 조짐이 새어나오는 가운데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역시 붕괴될 조짐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4일(현지시간)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고위 법관 1인과 전문가 수십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설치해 여객기 피격 사건을 심리하는 방안을 법원에 요청했다고 이란 국영매체를 인용해 전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전 세계가 이 재판을 지켜볼 것”이라며 “국민들에게 이 문제가 솔직하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군사령관 출신인 그는 “방공 문제에 대해 잘 안다”며 “이 문제에 책임 있는 사람은 버튼을 누른 한 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따르는 군부는 진상규명과는 어긋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BBC방송 등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여객기 피격 당시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이란인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관련 영상을 처음 게재한 런던 주재 이란 기자는 자신의 정보원이 안전하며, 당국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했다고 주장했다.
NYT는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대통령과 혁명수비대에서 나온 모순된 신호는 이란 집권세력 내의 권력 경쟁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다만 집권세력 전체를 향해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지자 정부와 군부는 참사의 근본책임을 미국에 돌리며 국면전환을 시도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비정상적 상황(여객기 격추)을 조성한 쪽은 미국이라는 점은 자명하다”며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중동 전역에서 지지를 받고 미국의 음모를 좌절시키자 살해했다”고 말했다. 라메잔 샤리프 이란 혁명수비대 대변인도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보복은 미군을 중동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란 핵 합의 유럽 참여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은 이란이 합의사항을 위반했다고 비판하며 공식 분쟁조정절차에 착수했다.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던 유럽 3개국마저 탈퇴 가능성을 내비친 것으로 최악의 경우 JCPOA가 붕괴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한발 더 나아가 새 협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프·독 외무장관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이란이 JCPOA에서 약속한 사항들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며 “분쟁조정절차에 근거해 공동위원회를 소집하는 일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밝혔다. 이란 정부가 지난 5일 JCPOA에서 정한 핵프로그램 제한 조항을 지키지 않겠다며 우라늄을 원하는 만큼 필요한 농도까지 농축하겠다고 선언한 데 따른 조치다.
3개국 외무장관은 다만 “이란에 최대 압박을 가하는 캠페인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JCPOA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지금 바로 합의를 파기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은 일축한 것이다.
하지만 3개국 공조가 얼마나 유지될지는 불투명하다. 존슨 총리가 BBC방송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기존 합의를 트럼프안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BBC는 “JCPOA를 미국이 서명할 수 있는 형식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체결한 JCPOA가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어하는 데 실패했다며 2018년 5월 JCPOA를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했다. 이에 이란은 지난해 5월부터 합의 이행 범위를 단계적으로 축소했다.
권중혁 이형민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