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관세 폭탄으로 무역전쟁의 포문을 연 지 약 18개월 만에 중국과 1단계 무역 합의에 서명했다. 중국은 농산물 등 미국산 제품을 대규모로 구매하는 동시에 지식재산권과 금융 서비스 등에서 개혁을 하고, 미국은 대중국 추가 관세 철회 및 일부 제품의 기존 관세율을 낮추는 게 골자다. 양국은 이에 따라 일단 휴전 모드로 들어섰지만 또 다른 난관인 2단계 협상이 남아 있어 갈등의 불씨가 계속 살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과 중국은 15일(현지시간·한국시간 16일 새벽) 워싱턴 백악관에서 1단계 무역 합의 서명식을 열고 86쪽가량의 1단계 합의문에 서명했다. 앞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지난 11일 “서명식 전날 밤에는 만찬, 서명식 후에는 오찬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외신들에 따르면 중국은 4개 부문에서 향후 2년간 2000억 달러(231조7000억원) 규모의 미국산 제품 등을 구매하기로 했다. 로이터통신은 구매 합의가 공산품 800억 달러, 에너지 500억 달러, 농산물 320억 달러, 서비스 350억 달러 규모로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항공기, 농기계, 의료장비, 반도체 등이 미국산 공산품 구매 품목에 포함될 것이라고 전했다. 제품 구매 외에도 지식재산권 보호, 강제 기술이전 금지, 금융 서비스, 환율, 중국에 대한 시장 접근 확대 등 폭넓은 내용이 1단계 합의에 담겼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중국이 합의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미국이 관세를 재부과할 수 있는 ‘이행강제 메커니즘’도 합의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합의 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90일 이내에 관세를 재부과할 수 있고, 중국 측은 보복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당초 지난해 12월 15일부터 부과할 예정이었던 1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고, 12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에 부과해온 15%의 관세를 7.5%로 줄이기로 했다. 다만 2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제품에 대한 기존 25% 관세는 그대로 유지되며, 오는 11월 대선까지 이 기존 관세는 변동이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관세 추가 인하는 앞으로 최소 10개월간 중국의 1단계 무역 합의 이행 여부를 지켜본 뒤 논의될 것”이라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중국 매체들은 1단계 합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기대를 내놓았다.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논평에서 “중국과 미국은 먼 길을 돌아 1단계 합의에 다다랐다”면서 “미국이 지난 2년간 중국을 무차별 압박했지만 1단계 합의는 환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환구시보는 사평에서 “중·미 무역 관계가 이제야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 한다”며 “이 길에는 많은 도전이 있고, 아직 무역전쟁의 여러 원인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은 1단계 무역 합의 서명을 앞두고 미국산 닭발 수입을 승인하는 등 유화 제스처도 보였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 상하이 세관이 전날 미국산 닭발 23.94t의 통관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2015년 미국의 조류인플루엔자 발병에 대응해 미국의 모든 가금류 수입을 금지한 지 5년 만의 첫 승인이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