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불안은 현재를 잠식한다

입력 2020-01-16 04:01

그래도 경제부장이라고 간혹 친구나 아는 이들이 묻고는 한다. 지금 집을 사도 되냐고. 명확한 근거나 확고부동한 수치를 기대해서는 아니다. 이미 내린 결정을 응원하고 합리화할 답을 얻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주변도 없고 잘 모르기도 해서, 늘 원하는 말이 아닌 뜬구름만 읊는다. “지금은 뉴노멀(새로운 표준)의 시대입니다. 저금리, 저성장, 저물가가 같이 흘러가는 게 이상하지 않죠. 생산이나 투자가 아닌 부동산으로만 돈이 몰리면 언젠가는 거품이 터질 수밖에….”

말을 뱉고 나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아 거꾸로 물어봤다. 왜 집을 사려고 하느냐,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없느냐. 주식과 부동산의 수익률 비교, 상대적 박탈감, 내 집 마련의 어려움, 불로소득의 불평등, 저금리가 빚어내는 부작용, 빈익빈 부익부 같은 ‘쳇바퀴’를 돌고 돌아 근원에 살짝 닿은 적이 있다. “내 아이들이 나만큼이라도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노후도 불안하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야 하는데, 부동산만 한 재테크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망해도 깔고 앉으면 되잖아.”

며칠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가까운 선배는 A대학에 입학한 막내 자랑을 길게 늘어놨다. 한참을 듣던 옆자리의 다른 선배는 올해 고교 3학년이 되는 아들이 A대학만 가도 좋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학했다는 자랑과 그 대학만 가도 좋겠다는 묘한 뉘앙스의 차이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대학 간판이 뭐가 중요하냐, 앞으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오면 인간은 더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 몰두해야 하는데 일자리 타령은 시대착오적 아니냐 같은 말을 던졌다. 돌아오는 건 세상물정 모른다는 타박이었다. 길고 긴 사교육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고 ‘인(in) 서울 대학’ 입학이라는 결승선을 밟은 선배에게 되물었다. 몇 개의 ‘껍질’을 까고 나서야 만난 진심은 이랬다. “우리 사회에 사다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조국을 봐라. 그 정도나 되는 사람도 자녀 교육과 미래에 사활을 걸지 않느냐. 자기만큼이라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는 알량한 기득권이라도 물려주려고 그러는 것이다. 다들 불안한 게지.”

여기도 불안, 저기도 불안이다. 교집합에 들어 있는 불안은 꽤 힘이 세다. 반드시 그것 때문이라고 할 인과관계가 없어도, 깔끔한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빈틈을 파고든다. ‘불안의 유령’은 어디까지 팔을 뻗고 있을까. 이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얼굴로 출몰하고 있다. 고단한 현재와 흔들리는 미래가 빚어낸 저출산, 지칠 줄 모르고 부모들의 돈·시간을 빨아들이는 사교육, 모든 청춘이 쇄도하는 안정적 일자리(의사·공무원에 공기업 직원까지), 욕망의 용광로가 된 부동산…. 다양한 모습이지만, 가면을 벗겨내면 하나의 얼굴만 남는다. ‘고인 물 사회’가 바로 그 얼굴이다.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위태롭다. 희망을 잃은 구성원들은 현재를 폭주하거나 미래를 저당 잡힌다. 과거 왕정국가라면 피비린내 나는 역성혁명을 불러오기도 한다. 꽉 막힌 골품제에 갇혔던 통일신라가 고려로 넘어갔을 때도, 부패한 권문세족에게 발목 잡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시기에도 그랬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파도 앞에 선 지금의 시간은 아마도 역동성을 시대정신으로 요구하는지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불리는 AI는 예측불허의 파괴적 변화를 동반한다.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바꿀지 알기 어렵다. AI에 국가의 흥망성쇠가 달렸다는 관측까지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 더 역동성과 혁신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낯선 길’ ‘확실한 변화’를 얘기하면서 ‘규제혁신’ ‘투자 인센티브’ ‘사람 중심의 창의와 혁신’을 언급했다. 정부의 올해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혁신과 성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됐다. 다른 건 몰라도 올해는 국가, 기업, 가계 모두에서 역동적인 틀을 만드는 ‘변화의 시간’이 간절하다.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김찬희 경제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