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토안보부(DHS)가 기후활동가들을 대량살상 범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 등과 함께 관리가 필요한 극단주의자 명단에 올려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활동가들이 서구권을 중심으로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부각되자 이들의 투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공방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13일(현지시간) DHS 내부 문건을 입수해 미 행정부가 대형 송유관 사업에 저항하는 기후활동가들을 백인민족주의자나 대량 학살 범죄자 등과 더불어 극단주의자로 분류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5명의 기후활동가는 2016년 10월 미국·캐나다 국경 4개 지역에서 캐나다산 오일샌드(원유가 함유된 모래암석)에서 추출된 원유를 미국 정유시설로 운반하는 송유관 밸브를 잠갔다가 체포됐다. 수시간에 걸쳐 원유 수송이 차질을 빚었고 이로 인해 가로막힌 원유량은 미국 하루 소비량의 15%에 달했다. 환경단체 ‘밸브 터너스(Valve Turners)’ 소속으로 알려진 이들에 대한 재판은 기후활동가들이 범죄 소지가 있는 행위를 저지르는 일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환경론자들은 그동안 심각한 수질오염을 일으킨다며 오일샌드 개발에 반대해 왔다. 반면 석유산업계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오일샌드를 정유시설이 위치한 미국 텍사스주로 보내 정유작업을 거치면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판단해 총길이 1800여㎞의 키스톤 송유관을 건설 중이다.
DHS는 2014~2017년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사건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움직임에 주목했고 밸브 터너스를 ‘환경 극단주의자’로 테러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9명이 숨진 2015년 사우스캘로라이나주 찰스턴교회 총기난사 사건의 백인 범인,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 유혈사태 주동자 등이 함께 포함됐다. 해당 문건에는 ‘인종 및 환경 이데올로기’가 미국 내 테러의 주요 원인이라고 명시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일각에선 DHS가 기후활동가들을 극단주의자로 선정한 것은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었던 마이크 게르만은 “기후활동가들이 테러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충족시킬 만한 치명적 폭력의 유형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며 대량 학살에 책임이 있는 백인우월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기후활동가들의 행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를 놓고 영국도 갈등을 빚고 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영국 대테러 경찰은 최근 발간한 소책자에서 기후변화 대응 운동단체인 ‘멸종 저항’과 동물보호단체 등을 백인우월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네오나치 세력과 한데 묶어 ‘급진주의 위협 세력’으로 분류했다가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이를 번복하고 책자를 회수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