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또다시 미국 주도의 일방적 비핵화 협상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이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지만, ‘제재 해제 이상’을 요구하며 협상 문턱을 높임에 따라 당분간 북·미 비핵화 협상은 재개되기 어려워 보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은 지난 11일 담화문에서 미국에 대한 강한 불신과 불만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는 “우리는 미국과의 대화탁(탁자)에서 1년 반 넘게 속히우고(속임을 당하고) 시간을 잃었다”며 “이제 다시 우리가 미국에 속히워 지난 시기처럼 시간을 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고문은 특히 “인민이 겪는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일부 유엔 제재와 나라(북한)의 중핵적 핵시설을 통째로 바꾸자고 제안했던 베트남에서와 같은 협상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2016년 이후 채택된 유엔 대북 제재 중 5건의 해제를 맞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이 거부하면서 협상이 ‘노딜’로 끝났다. 김 고문은 제재와 핵시설을 교환하는 방식의 협상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수긍해야만 협상이 재개될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지난해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북·미 실무협상이 결렬된 직후 대화 재개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운 ‘대북 적대시 정책의 완전한 철회’를 여전히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및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단’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채택된 미국의 독자적 대북 제재 해제’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흔쾌히 수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미는 지난해 10월 이후 한·미 연합 공중훈련 ‘비질런트 에이스’를 전격 연기하는 등 북한의 요구를 상당히 수용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북한은 별로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올해 내내 대선 재선 레이스를 치러야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입장에선 북한의 ‘비핵화 로드맵’을 손에 쥐기 전에 대북 제재를 풀어주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한도 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고문은 “우리는 미국이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우리는 우리가 갈 길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제재가 유지되는 현 상황을 일단 자력갱생으로 돌파해 가겠다는 얘기다.
북한이 대화 재개 의지를 우회적으로 피력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12일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빨리, 일부러 공개한 것은 그만큼 북한이 이를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김 고문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도 밝혔다. 이 때문에 북한이 당분간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은 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미국이 제재를 해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북한이 알고 있음을 감안하면 결국 오는 3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재개 여부가 북·미 협상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