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영혼의 영토에 꿈의 꽃씨를 뿌렸다

입력 2020-01-14 00:06
새에덴교회는 1988년 7월 서울 가락동 지하상가에서 8명의 성도로 시작됐다. 89년 여름 새에덴교회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찬양을 하고 있다.

나의 목회는 원래 ‘곰의 목회’였다. 곰은 겨울잠을 자기 전에 나무에 올라가 떨어져본다고 한다. 떨어져서 몸이 아프면 다시 양식을 더 먹고 아프지 않으면 굴에 들어가서 겨울잠을 잔다고 한다. 나의 목회 역시 ‘곰의 목회’였다. 왜냐면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단 한 번도 부교역자 생활을 하며 목회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척을 하며 직접 몸으로 부딪쳐 스스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실패와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이정동 교수의 말처럼, 성공과 실패가 축적이 되면서 꽃씨 목회의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나는 개척자금이 없으니까 서울에서 신학교 수업이 끝나면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서울 개척 후보지를 물색하고 다녔다. 신도시 목회의 꿈이 없어서 목동, 상계동을 두루 살펴보았다. 나중에는 영등포, 대림동, 궁동, 오류동, 온수동까지 다 다녔다. 왜냐면 앞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쓰시고 내가 개척한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은 서울이되 위성도시인 부천이나 의정부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지역까지 찾아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 가락동을 찾았다. 당시 가락동은 신흥 개발 지역인데다가 분당 신도시 계획이 발표되기 전이었지만 구 성남시까지 흡수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학력이나 스펙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이 개척을 준비했지만 꿈은 컸다. 당시 목동이나 상계동은 상가를 얻어 교회를 개척하려면 억대가 필요했는데 가락동은 1000만~2000만원 보증금에 월세를 내면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락동 23평 지하상가에서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교회를 개척했다. 훗날 맨땅, 맨발, 맨손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부흥을 이루었다고 해서 ‘맨발의 소명자’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나는 장소를 계약하기 전에 지역 조사부터 착수했다. 개척 교회의 지역과 장소 선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그물이 좋고 어부가 훌륭해도 고기가 없는 곳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개척자들이 이런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교회를 시작하다 어려움을 겪는다. 먼저 자신을 알고, 지역과 사회를 알고, 전도 대상층을 바로 이해하면 모든 일이 비교적 쉬워진다. 자신의 달란트는 무엇인가, 자신의 은사가 이 지역 주민의 특성에 맞는가만 확실하면 개척의 성공은 보장된다.

나는 개척 멤버 한 명도 없었지만 가슴에 뜨거운 소명감을 불태우며 온 몸으로 뛰었다. 새벽기도를 하고 나서 주보를 뿌리고 전도지를 뿌리고 다녔다. 문제는 아파트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새벽기도 이전에 일어나서 집사람과 신문배달을 했다. 단 신문 속에 우리 교회 전단지를 넣어 돌리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나 나는 신문만 배달한 것이 아니라 위층에서부터 아래층까지 교회 전도지를 꽂아놓고 왔다. 아파트 뿐만 아니라 가락동 거리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로 누비고 쓸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고 집집마다 전도지를 뿌리고 다녔다.

이렇게 하면 그 다음 주간에 사람들이 수십 명 몰려올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물론 한두 명씩 온 것은 사실이지만 등록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다. 설교가 양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토요일날 저녁에는 강단에서 설교 연습을 몇 번이나 했다. 그렇게 설교 리허설을 한 후 강단에서 내려와 빈 의자를 붙잡고 기도하고 다녔다. “하나님 사람 좀 보내주세요. 길을 지나가는 걸인이라도 좋으니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제 생명을 다 바쳐 목회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면 또 가슴이 뜨거워져 정말 의자를 눈물이 촉촉하게 적실 정도로 울고 또 울며 기도했다. 한 마디로 그때부터 의자에 눈물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사람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그때 온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하거나 번지르한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 근처에 올림픽 패밀리 타운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렇게 신문을 배달하며 전단지를 돌려도 그 동네에서는 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부터도 그런 교회는 안 나갈 것 같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낮예배 때도 쥐들이 짹짹 거리며 우글거리는 칙칙한 지하실 교회에 누가 오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상처 받고 가슴에 한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생명처럼 사랑하며 상처와 아픔을 품었다. 그리고 최고의 설교를 하려고 몸부림쳤다. 영혼의 영토에 꿈의 꽃씨, 생명의 꽃씨, 사랑의 꽃씨를 뿌린 것이다. 그리고 집사람은 가락시장에서 상인들이 버리고 간 배추와 무시래기를 주워 다가 주일이면 찾아오는 성도들에게 된장국을 끓여 대접했다.

나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한과 아픔을 안다. 그러나 그 한과 애환으로 끝나지 말고 지금 남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또 찾아오는 몇 사람의 가슴 속에 꿈의 꽃씨, 생명의 꽃씨를 뿌리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 꽃씨는 어떻게 뿌리고 어떻게 싹이 나고 자라게 되었는가.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생명나무 선택은 예수의 생명, 정신·사상 따르는 것


오늘날 구원의 도정에 있는 성도와 교회론적인 범주에서 생명나무란 무엇이며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건은 창세기 2장과 3장의 사건으로 이미 종결됐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생명나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빛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나무를 알아야 한다. 사탄이 선악과 사건의 패러다임을 갖고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해 오고 생명나무의 교훈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생명의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 순간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며 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2의 아담으로 오신 것처럼, 둘째 생명나무로 오셨다. 우리는 생명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그분의 생명을 선택하고 말씀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생명나무를 선택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생명뿐만 아니라 정신과 사상을 따라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절대로 삶 속에서 주인이 돼선 안 된다. 선악의 지식을 추구하거나 자의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내 안에서 거듭나 있는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존재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그러니 순간순간마다 예수님의 생명을 사모하고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 신앙이다.

생명나무 신앙을 지닌 사람은 절대 옛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새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갖고 새 생명의 법칙과 새 생명의 원리로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자기 생각과 똑똑함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나 경험, 지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언제나 말씀의 생명을 추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살아간다.

그러니 생명나무 신앙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는 삶을 살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가 선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다. 말씀과 성령만을 추구하고 따른다. 그것이 내 선입견에 맞느냐 안 맞느냐, 내 도덕적 기준과 윤리적 잣대에 맞느냐 안 맞느냐는 그다음이다. 그것이 내게 생명이냐 아니냐,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냐 아니냐에만 관심을 둔다.

그래서 나 자신이 정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 맞지 않아도, 심지어 자신에게 어떠한 손해와 불이익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실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생명이 되고 은혜가 되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그것이 과거 내게 생명이고 은혜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가 된다면 과감하게 목숨을 걸고 선택한다. 신앙생활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쁘신 뜻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생명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두고 오직 생명에 우선순위를 두며 모든 것을 선택한다.

내 선악의 지식과 판단의 안경을 쓰고 보면 교회도 비난하고 공격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목사가 어땠느니, 목사의 가족이 어땠느니, 교회가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불평하고 비난할 요소가 많을 수 있다. 인간 편에서 볼 때는 그들의 말이 다 옳은 것같이 들린다. 그들은 선악의 논리에 명철한 사람이고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과연 생명이 있으며 눈물 젖은 감동과 행복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두 눈은 선악의 빛으로 반짝거리는 것 같지만 얼굴은 영적으로 굶주려 메말라 있고 영혼은 기갈과 배고픔으로 허덕이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본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한 사랑의 안경을 쓰고 교회를 바라본다.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섬기고 포용하며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편을 선택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생명나무를 언제나 꼭 붙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악과를 선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