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셈 솔레이마니 폭살 사건으로 반(反)미국 공세에 나섰던 이란 정부가 치명적인 실수로 외교적 궁지에 몰렸다. 우크라이나국제항공(UIA) 소속 여객기의 추락 원인이 이란 미사일에 의한 격추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국면 전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란 집권세력 흔들기를 본격화했다.
이란군 합동참모본부는 11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사고기는 테헤란 외곽의 민감한 군사 지역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며 “미국의 모험주의가 일으킨 위기 상황에서 이를 적기로 오인한 사람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비행기가 격추됐다”고 밝혔다. 서방 세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던 격추설을 ‘음모론적 심리전’이라고 부인하던 이란 정부가 사고 사흘 만에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사고기인 보잉 737-800 여객기는 지난 8일 테헤란 이맘호메이니공항에서 이륙한 지 2분 만에 추락했다.
오인 발사 책임자인 이란 혁명수비대의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방공사령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소식을 듣고 죽고 싶었다”며 “모든 책임을 인정하고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자데 사령관은 지난해 6월 호르무즈해협 인근 상공에서 미군 무인정찰기를 대공미사일로 격추해 영웅이 됐던 인물이다.
이슬람혁명을 수호하는 혁명수비대와 정규군 이중체계로 운영되는 이란군에서 혁명수비대는 최정예군으로서 특별 대우를 받는다. 혁명수비대의 핵심 고위 장성이 공개적으로 작전 실패를 반성하는 모습은 이례적일 수밖에 없다. 체제 수호 역할을 맡는 혁명수비대의 평판 추락은 곧 이란 집권세력의 정당성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솔레이마니 암살 작전에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이란 성토로 전환되고 있다. 참사 발생 후 사건 현장을 훼손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이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자국인 다수가 희생된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의문이 해소되기 전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란 측에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보상금 지급 등을 촉구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두 정상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
미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국면 전환에 나섰다. 민생고와 기득권층인 이슬람혁명 세력의 부패에 대한 불만으로 지난해 말 이란 전역을 뒤흔들었던 반체제시위가 이번 사태로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앞장서 불을 지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용감하게 오랫동안 견뎌온 이란 국민들에게 고한다. 내 임기가 시작된 이래 나는 당신들과 함께 서 있었으며 나의 행정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어로 작성된 트윗도 함께 올렸다. 이란 집권세력 흔들기를 본격화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린 이란이 미국과의 새로운 핵 합의를 위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반미 강경파인 군부의 영향력이 위축되면서 온건파가 국민 여론을 달래기 위해 제재 해제의 길로 나설 것이라는 예상이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란과 협상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