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재선은 1년 전만 해도 예상하기 힘든 시나리오였다. 2018년 11월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에서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은 참패했고 차이 총통도 위기에 몰렸다. 그가 2016년 집권한 뒤 연금개혁, 동성결혼 합법화 등을 추진하고 ‘탈중국화’ 이슈로 본토와 자꾸 부딪히자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차이 총통은 이후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해 최악의 레임덕이 예상됐고, 2020년 재선도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중국이 반중 성향의 차이 총통을 수렁에서 건져줬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대만 무력통일’을 거론하고, 중국군의 무력시위가 이어지자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중국이 본토 주민의 자유여행 금지 등 경제적 보복 조치까지 동원하자 반중 정서가 대만 내에서 확산됐다.
게다가 지난해 홍콩 시위와 경찰의 강경 진압은 반중 정서에 불을 질렀다. 대만인들은 “우리도 홍콩처럼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절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퍼졌다. 위기에 빠졌던 차이 총통을 중국이 구해준 셈이다.
차이 총통은 대만 토박이를 가리키는 ‘본성인’(本省人)이다. 국민당 후보였던 한궈위 가오슝 시장은 ‘외성인’(外省人)의 아들이다. 외성인은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해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본토인들을 뜻한다. 지역감정이나 정치적 성향에서 외성인과 내성인의 갈등은 뿌리 깊다.
차이 총통의 조부는 광둥성에서 일찌감치 대만으로 이주한 객가족(하카족) 출신이고, 조모는 대만의 원주민 출신이다. 부친은 자동차 수리업으로 시작해 부동산 투자로 영역을 넓혀 큰돈을 벌었다. 1956년 태어난 차이 총통은 국립 대만대학 법대를 나와 미국 코넬대와 런던정경대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후 국립정치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정부 자문역할을 했고 대만의 관세·무역 협정(GATT),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 과정에서 수석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대만 독립 추구 진영의 이론가 역할을 하며 정계에 발을 담갔다.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된 뒤 그는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에 발탁돼 양안 관계 전면에 나섰다.
2008년 대선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에 패하자 차이잉원은 당 주석이 됐다. 대만의 첫 여성 총통 후보로 나선 2012년 선거에선 실패했으나 2016년 재도전해 정권을 탈환했다.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보다는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라는 평가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