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파병 압박에 깊어가는 고민… 文정부 ‘노무현의 길’ 가나

입력 2020-01-09 04:02
이란군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탄도미사일 공격을 가한 8일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경찰이 근무를 서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이란 간 전면전 가능성 등 향후 전개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란의 이라크 미군기지 공격으로 중동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미국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구도 거세지고 있어 정부가 고심에 빠졌다. 정부가 파병 결정을 섣불리 내렸다가는 2003년 노무현정부의 이라크 파병 때처럼 핵심 지지층의 거센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사실상 이란이 통제하는 원유 수송 루트다. 미국은 지난해 호르무즈해협에서 유조선 피격이 잇따르자 공격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공동방위 동참을 요청했다.

파병에 관해 8일 외교부는 “호르무즈해협 인근을 통항하는 우리 선박 및 국민 보호 필요성, 해상 안보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의 기여 등을 감안해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계부처 간 검토를 진행 중이며, 구체적인 사항은 아직까지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파병 압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전날 KBS 인터뷰에서 한국군의 호르무즈해협 파병을 강하게 요청했다. 해리스 대사가 공개 발언으로 압박하자 정부 내에서는 난감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해 미국이 처음 호르무즈해협 파병을 요청했을 때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동맹 관계만을 고려해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점을 고려해 상선 보호 차원에서 청해부대(소말리아 아덴만 해역에서 임무 수행 중)의 작전 범위를 확대하는 식의 파병 방안이 거론됐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과 이란의 충돌로 전운이 감돌고 있어 파병할 경우 정부가 지게 될 부담이 매우 커졌다. 우선 파병에 대한 국내 반대 여론이 고민이다. 미·이란 갈등 속에 한국이 연루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이란군 실세 제거 작전을 무리하게 펼친 미국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아 정부가 파병의 명분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 이란산 원유 수입 비중은 크지 않지만, 미국의 대이란 제재 해제 후 경제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이란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동맹을 우선해 호르무즈해협 파병을 결정할 경우 2003년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당시 노무현정부가 겪었던 것처럼 핵심 지지층의 이탈을 불러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4·15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반발 여론을 무시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여권 내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중동 정세를 관망하자는 기류가 강하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한 의원은 “정부가 신중히 결정해주기를 바란다”며 “(파병을 하게 되면) 이란뿐 아니라 중동 지역과 적대 관계에 놓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앞장설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외통위 소속 다른 민주당 의원도 “성급하게 결정해선 안 될 문제”라며 “미국이 압박을 하겠지만 그걸 견뎌야 하고, 지금 괜히 (파병하면) 미·이란 간 전쟁에 끼어드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은 “한·미동맹뿐 아니라 잠재적 측면에서 고려할 게 많은 사안으로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되고 최대한 신중하게 사태를 지켜봐야 한다”며 “사태가 조기에 정리되지 않는다면 유가가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무역 및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헌 신재희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