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뜻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 무려 30년 만에 무대에 선 중년의 가수가 막 데뷔 무대를 마친 20대 자신의 영상을 보면서 말했다. 2019년 연말에 방영된 한 프로그램 속 풍경이다. 네티즌과 유튜버들에 의해 ‘시간 여행자’라는 별명을 얻은 양준일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말에, 함께 방송하는 사람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그리고 나중에 기사를 통해서 내용을 접한 나도 울컥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발랄하고 신나게 자신의 재능을 무대에서 발산하고 있는 스물한 살의 젊은이, 그의 환한 웃음 뒤에 무슨 일들이 펼쳐졌는지, 이후 30년의 시간을 통과한 그도,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우리도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갖게 된 감정이었다. 재미교포 청년이었던 그는 1990년대 초 가수로 데뷔했으나 노래나 춤, 언어, 옷차림이 당시의 ‘주류’ 풍조와 달랐던 탓에 배척받고 쫓겨나듯 고국을 떠났다고 했다. 이후 몇 번의 시도도 막히고 지금은 뒤늦게 일군 가족의 가장 역할을 충실히 하며 미국의 한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젊은 유튜버들이 그의 영상을 찾아내 공유하면서 30년 만에 스타가 됐다. 최근 귀국해 무대 공연과 광고 촬영, 팬 미팅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그가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무대에 서고 팬들의 갈채를 받는다고 해서 이를 ‘완벽’이라고 칭하고 싶지는 않다. 그조차 성공과 성취의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과 ‘완벽’이라는 말이 담아낸 것은 하루하루, 순간순간 그가 결코 멈추지 않았던 성실한 사랑의 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랬기에 겸손한 몸짓과 선한 표정, 그리고 세상을 향한 소망의 언어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겠지.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50대의 양준일이 20대 양준일의 인기를 넘어섰다”고. 그건 왜일까.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했더라도 어찌 30년 전 파릇하고 힘찬 젊음을 이길 수 있으랴. 하지만 이건 겨루기가 아니다. 재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 가운데,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가 떠오를 때마다 자꾸 비워냈다는 그는 빈 공간을 현재 만나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관계들로 채워나갔다고 했다.
그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공적으로 밝힌 바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모든 관계 안에서 이뤄가는 ‘완벽’이라면 우리 크리스천은 이미 익숙한 표현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에서 한 바로 그 신앙고백 말이다.
성과주의에 사로잡힌 세상을 살다 보니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조차 성공과 성취로 해석할 때가 많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룬 선’이 나 개인이나 내가 속한 공동체의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결코 ‘완벽’일 수 없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완성을 미리 경험하고 확신하시며 고난의 쓴잔을 마셨다. 조직신학자 판넨베르크는 미래의 완성된 기준을 현재로 불러와서 지금을 지탱하는 동력으로 삼는 삶의 자세를 ‘예기적 삶(proleptic living)’이라 불렀다. 그걸 알고 믿고 보았기에 예수께서는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의심하지 않으셨으리라.
새해다. 연도가 달라졌다고 우리 삶이 급격하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급격하게 좋아진들 그것이 또한 영속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완벽한 이루심을 믿는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 당면하는 모든 일을 선한 마음으로 사랑의 자세로 맞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자체로 완벽하신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오늘 여기에서 그 질서에 참여하는 삶 가운데 내가 경험하는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을 다 ‘예기적’으로 맞이하고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