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방부 수뇌부가 편지 한 장에 발칵 뒤집혔다. 미군 이라크 태스크포스(TF)의 책임자인 윌리엄 실리 해병대 여단장이 이라크 연합작전사령부 사령관에게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이라크의 주권적 결정을 존중해 병력을 이동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기 때문이다.
실리 여단장 명의의 서한에는 “이라크 의회와 총리의 요청에 따라 통합합동기동부대(CJTF-OIR)는 다가오는 수일이나 수주 동안 병력을 재배치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앞서 이라크 의회는 이라크 주둔 미군 철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 국방부는 6일(현지시간) “철수는 없다”며 이 서한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가셈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원칙 없이 흔들리는 ‘트럼프 시대’ 군의 난맥상이 또 노출된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AFP통신은 실리 여단장의 서한을 인용해 “이라크 의회가 자국 정부에 외국군 철수를 요구한 지 하루 만에 미국이 이라크 내 병력 철수를 이라크 연합작전사령부에 통보했다”고 전했다. 이슬람국가(IS) 대응을 위한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이었다.
국방부 수뇌부는 당황했다. 미군 철수 요구 시 이라크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브리핑을 자청해 “이라크를 떠난다는 어떤 결정도 내린 적이 없다”며 “미국은 여전히 동맹국들과 함께 이라크 내 IS 대응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석한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서한은 초안이었고 실수로 보내진 것”이라며 “그 서한은 보내져서는 안 됐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솔레이마니 제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꾸준히 대(對)이란 강경책을 취할 것을 주문해온 폼페이오 장관의 노력이 일관성 없는 트럼프의 정책 결정 방식과 결합되면서 무리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암살 승인은 폼페이오 장관을 앞세운 관료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익명의 행정부 관료들에 따르면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연말 수시로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 대응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지난 10여년간 이란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온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승인 결정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미지 걱정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6월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인근에서 미 무인기(드론)를 격추시켰을 때 트럼프 행정부는 보복 조치로 군사 공격을 계획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공격 직전 계획을 철회했다. 6개월 후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소행으로 추정되는 포격을 받아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서 미국인 1명이 숨지자 그는 대외적 이미지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란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겁을 먹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비쳐지게 될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란 공격 철회 결정에 실망했던 폼페이오 장관은 기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미 육사 동기인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가 솔레이마니 제거가 포함된 이란 대응책을 제시했다. WP는 에스퍼 장관의 보조가 제거 승인이 나는 데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