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으로 우리나라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각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나서 큰 도움을 줬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전쟁 직후인 1953년 아동복리회(SCF)란 이름으로 구호사업을 했다. 70년대엔 한국지역사회복리회 이름으로 미국 AID 원조를 받아 농촌 지역개발사업을 펼쳤다.
나는 이 현장에서 일하며 사업신청서와 중간보고서, 최종 결과보고서 및 모니터링과 평가서를 쓰는 훈련을 받았다. 세이브더칠드런 미국은 미국 AID 차관을 받아 적지 않은 개발도상국을 도왔다. 이 중 한국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 나라였다. 늘 ‘자조 정신이 강하고 근면·성실한 국민’이란 평가를 받았다.
80년대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자 세이브더칠드런 미국의 한국지부가 아닌,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을 세우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업은 자신 있었지만, 재정 자립이 어려웠다. 이후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은 독립된 세이브더칠드런을 세웠고 점차 당당한 회원국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외국의 원조로 진행된 국내 개발사업 현장에서 일한 사람이다. 1997년, 우리가 그간 쌓은 지역사회개발 경험과 지식, 기술로 개도국을 도울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한국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를 둔 ‘한·월 청소년’ 직업훈련센터 설립 및 운영 사업부터 시작했다. 이어 중국 내몽고 빈곤 지역 초등학교에 교재 및 교구, 놀이기구를 지원하는 사업도 펼쳤다.
이들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 내몽고 빈민가에 영유아 보육시설을 세우자는 사업신청서를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냈다. 이즈음 미국서 유학하고 싱가포르에서 활동 중인 마롱 베이징대 교수를 만난 건 참 기이한 일이다. 마롱 교수는 사회인류학자다. 내몽고 주민에 대한 애정으로 10년간 그곳 주민과 함께 살며 연구했다. 그의 지원으로 중국 내몽고 자치정부와 연결됐고, 그의 조언을 받으며 사업을 진행했다. 애초 우리는 1층 건물을 세우려 했다. 내몽고 자치정부는 3층 건물을 원했다. 우리 계획보다 크고 영구적인 건물을 원했다. 결국 3층 건물이 세워졌다. 현지 부군수는 개원식에 참석해 이렇게 축사했다. “여기 모인 우리는 100년 후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건물은 그대로 남아 계속 아이들의 행복한 배움터가 돼 줄 것입니다.”
3년 만에 이 사업을 종료하고 2002년 코이카에 새로운 사업제안서를 냈다. 미얀마 오지에 아동 인권에 기반을 둔 학령 전 아동보육센터를 세우고 이를 운영하는 사업이다. 세이브더칠드런 미국과 미얀마 호수촌에 학령 전 아동보육센터를 매년 2개 동씩 총 8동을 세우기로 했다.
중국 내몽고 사업에선 주민 자력으로 사업을 진행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정부 주도 사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업은 잘 마무리됐으나 사업 진행 과정에서 주민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동은 정부 보호 아래 교육받으면 그저 만족이었다.
미얀마 사업은 달랐다. 지역 주민이 사업의 주인이 됐고, 정부 관계자는 행정 지원을 했다. 자력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어린이집 한 동이 세워지면 주민 운영위원회와 급식을 담당하는 부모회가 결성됐다. 훈련된 어린이집 교사가 세워지면, 온 마을에 잔치가 벌어진다. 이들은 기쁜 일이 생기면 전통음악을 연주하며 다 함께 춤을 췄다. 자녀가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어린이집이 있어 기쁘고 감사해 여는 축제였다. 나는 8개 호수촌에서 열리는 축제에 매번 참여했고 그때마다 같이 춤췄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