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반 자고 나와… 방학 땐 학원 9곳 다녀요”

입력 2020-01-07 04:05
학부모들이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 계단에 줄지어 앉아 있다. 대치동 일부 학원에선 강의실의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아침부터 줄서기가 이어진다. 가방 줄서기는 허용되지 않아 학부모들이 학생 대신 줄서기에 나선다. 조민아 기자

“오늘 2시간 반 자고 학원 왔어요. 그런데 제 주변은 다 이렇게 해요.”

해가 뜨기도 전인 오전 6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학원가에서 만난 방모(18)양은 꽁꽁 언 손으로 학원 교재를 든 채 태연하게 말했다. 방양은 3월이면 고3이 된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방양은 “어쩔 수 없어요. 일주일 내내 이렇게 사는 친구들도 있는데…”라고 답했다.

같은 시간 강남구의 한 고교에 다니는 김모(18)양은 “방학에는 대치동 학원을 9곳 다녀요. 지금도 수업 들으러 가요”라고 급하게 말했다. 최모(18)군은 “하루에 14시간을 학원에서 보내요. 그런데 경기도에서 대치동까지 오는 애들도 있어요. 난 특별히 힘든 사람이 아니더라고요”라고 했다.

‘사교육 일번지’로 불리는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학생들은 오늘도 누군가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고된 하루를 견디고 있다. 새 학년 성적을 결정짓는다는 겨울방학에 학생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진다. 국민일보는 지난 5일 대치동 은마사거리에서 한티역까지 약 1㎞ 구간, 1000개 넘는 학원이 밀집된 학원가를 24시간 취재하며 학생과 학부모들을 만나봤다.

오전 6시30분. 대치동의 한 과학탐구학원 안에는 2층부터 5층까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3시간 전이다. ‘롱패딩’과 목도리, 담요로 무장한 학부모들, 문제집과 영어 단어장을 든 학생들은 교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으로 표시한 줄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오전 수업 강의실 앞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다. 광진구에 사는 방양은 “강의실이 워낙 커 안 좋은 자리에 앉으면 칠판이 안 보여요”라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자리 경쟁’에 동참하기도 한다. 한 할머니는 “새벽잠이 없어서 애들 부모 대신 왔다”고 말했다.

교실 문이 열리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차례로 들어가 300여개 강의실 좌석 중 재빠르게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 학부모는 아이들 책가방으로 자리를 맡았고, 학생들은 앉자마자 자습을 시작했다. 오전 8시 강의실 좌석의 반 이상은 차 있었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도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오전 7시30분 학원 근처 카페에서 만난 변모(18)양은 “수업은 오후 2시지만, 자습 때문에 주말에도 일찍 나와요”라고 말했다. 곽모(17)군은 “학원에선 오전 6시30분쯤 ‘일어날 시간입니다. 학원 올 준비 하세요’라는 내용의 ‘기상 문자’를 보내줘요. 수강생 관리 시스템이죠”라고 했다.

대치동 학원가에 입성한 학생들은 늦은 밤까지 학원 여러 곳을 옮겨 다닌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보내는 하루 중 학생들이 한숨 돌릴 시간은 많지 않다.

점심시간인 낮 12시. 학원 근처 편의점에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학생들로 가득 찼다.

한 남학생은 왜 컵라면을 먹느냐는 질문에 “숙제를 다 못해서요. 빨리 먹고 숙제해야 돼요”라고 짧게 답했다. 식사와 영어 단어 암기를 동시에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한 분식집 대표는 “새벽이고 밤이고 학생들이 끊이지 않아요. 이게 24시 음식점이 대치동에서 살아남은 이유죠. 근데 애들 보면 안쓰러워요”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학원에서 탈출 가능한 때는 10분 남짓한 쉬는 시간과 다른 학원으로 이동하는 시간뿐이다. 이때 학생들은 편의점에서 커피와 과자, 삼각김밥 등 간식거리를 닥치는 대로 산다. 교재를 베개 삼아 카페에서 쪽잠을 자기도 한다. 밤 10시까지 학원의 불은 계속 켜져 있다. 학원 자습실은 시간대와 관계 없이 80%가량이 차 있었다.

대치동 곳곳에 있는 ‘24시간 스터디카페’는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독서실과 다름없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학원이 끝나면 새벽까지 공부한다. 이모(18)군은 한 스터디카페에서 졸음을 쫓기 위해 일어서서 수학 문제를 푼다. 이군은 “학원 끝나고 새벽 1시30분까지 공부하고, 아침 6시에 다시 학원으로 와요”라고 말했다. 대치동에는 스터디카페만 수십개가 성업 중이다.

스터디카페 사장 이모(40)씨는 “대화가 가능한 공간도 있지만, 학생들은 한 마디도 안 해요. 소리를 일절 내지 않으려고 과자를 녹여먹기도 하고요”라고 했다. 12월 31일에도 자정까지 남아 자습하는 학생이 많았다. 이씨는 “대치동 스터디카페는 ‘빨간날’이 대목”이라고 했다.

대치동에서 먼 곳에 사는 학생들은 아예 고시원에 거주하기도 한다. 방 크기는 대부분 3평이 채 안 되지만, 월세는 60만원을 훌쩍 넘는다.

대치동에서 고시원을 17년간 운영하는 한 여성은 “마음 잡은 애들이 들어오니까 확실히 경쟁하는 분위기가 있어요”라고 했다. 그는 “언젠가 한 여학생이 ‘옆방 친구는 몇 시에 일어나요’라고 묻더라고요. 5시30분이라고 알려줬더니, ‘저는 5시20분에 깨워주세요’라고 합디다”고 말했다.

학부모 이모(48)씨는 “대치동에선 ‘고3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풍토가 있어요. 나는 자리 맡으려고 수업 전날 밤부터 줄 선 경험도 있습니다. 다 애들을 위한 부모의 마음이죠”라고 했다. 초등학생을 둔 차모(30)씨도 “부모 욕심 때문이 아니에요. 아이들도 이해가 잘 된다며 좋아합니다”고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각은 다소 온도차가 있었다. 공중전화를 이용하던 재수생 김모(19)양은 “학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선생님 앞에선 할 수 없어요. 자유시간이 거의 없고 힘들 때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지난해 영재고와 과학고 입시를 연달아 탈락했다는 이모(16)군은 “힘들지만 불만이 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요. 학교만 다녀도 되는 분위기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학원 근처 코인노래방에서 만난 임모(19)군은 “스트레스를 풀려면 이런 곳에 오는 방법뿐”이라고 말했다.

조민아 황윤태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