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면돌파전과 봉미통남

입력 2020-01-07 04:01

북·미 대립 장기화 시점엔
정전협정 당사자 역할 중요
남한도 촉진자 노력 다해야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 관한 보도’로 2020년 신년사를 갈음했다. 전원회의는 “중중첩첩 겹쌓이는 가혹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정면돌파전’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다. 북한은 전원회의에서 미국과 적대세력들이 편하게 살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의 전진 도상에 가로놓인 난관을 오직 자력갱생의 힘으로 정면돌파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번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북·미 대결을 ‘제재와 자력갱생의 대결’로 압축했다. 그만큼 제재가 북한을 매우 아프게 한다는 것을 집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북한은 북·미 대결의 장기성을 반영해 핵억제력 강화를 추구하면서 자력갱생으로 근근이 버텨내기(mudding through)를 하겠다며 지구전에 들어갔다. 김정은 위원장이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번영하여 나라의 존엄을 지키고 제국주의를 타승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북한 인민들은 ‘또 하나의 고난의 행군’을 감내해야 한다.

북한이 핵억제력을 바탕으로 자력갱생노선에 따라 경제전선(농업전선, 과학전선)과 외교전선의 진지를 구축하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전략무기체계와 첨단무기체계가 고도화된다며 미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미국이 셈법을 바꿔 ‘평화협상’을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핵억제력 강화를 방치할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북·미 협상을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북한의 힘을 점차 소모·약화시키는 것이 ‘미국의 본심’이라고 정리했다. 요컨대 미국이 대화와 제재로 시간을 끌면서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평화적 이행전략’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며, “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 입장에 따라 상향조정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비핵평화 협상’의 문턱을 높였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평화체제 구축 여부에 따라 비핵화 협상의 재개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며 협상의 문을 열어두고 공을 미국에 넘겼다.

평화체제 구축 문제는 한국전쟁 당사국들 사이의 다자협상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미 양자협상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할 경우 4자회담, 6자회담 등 다자협상으로 확대해 평화체제, 비핵화, 제재 해제,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북한의 밝은 미래 보장 등을 포괄적 의제로 다뤄 나가는 문제를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최고지도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양자 톱다운 방식으로 비핵평화 협상을 진행해 왔지만 북·미 대결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현시점에서는 정전협정 당사자들인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국전쟁을 끝내는 협상을 본격화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 동기를 없애야 비핵화 협상을 촉진할 수 있다.

이번 전원회의에서는 경제전선과 관련한 대내 문제, 북·미 관계와 관련한 외교전선을 주로 다뤘을 뿐 남북 관계와 북중·북러 관계에 관한 내용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과 적대세력들”이라고 언급할 때 한국이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직접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관계개선의 여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남북 관계는 북·미 관계에 종속돼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북측의 의도는 무시하고, 미국의 선의를 너무 믿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인사회에서 “평화는 행동 없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더 운신의 폭을 넓혀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올해 우리가 남북 관계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찾아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면 남북합의 이행을 위한 접촉과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이 미국의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하면서 선미후남(先美後南) 자세를 보일 때는 우리 정부의 역할 공간은 상당히 축소됐지만, 북·미 대결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진 현시점에서는 북한이 봉미통남(封美通南)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다시 북·미 협상을 견인하는 촉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관계와 평화협정의 당사자로서 한·미 연합 군사연습 중단,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유엔군 사령부 역할 조정, 남북합의 이행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세관리 노력은 자율성과 독자성을 확보해 적극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