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군부 최고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에 대한 미군의 공습 이후 보복을 다짐하고 있는 이란과 이라크 민병대의 향후 대응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수년간 미국과 이란 사이 공방의 중심지였던 이라크가 또다시 두 강국 가운데서 ‘대리 전쟁터’로 전락하는 동시에 중동이 다시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폴리시(FP)는 4일(현지시간) ‘트럼프가 중동에 불을 질렀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향후 중동 정세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란 정부 2인자를 암살하는 초강경책으로 이란의 기를 누를 수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은 중동을 통제불능 상태로 몰아넣는 성급한 오판이라는 지적이다. 이란은 중동 시아파 국가들의 맹주로서 중동 곳곳에 친(親)이란 세력을 심어놨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이란이 미국과의 전면전에 나설 가능성은 낮지만 ‘이란의 대리인’들을 사주해 대리전을 벌이며 공세 수위를 높여갈 기반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은 그간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 이웃 국가들을 대상으로 친이란 시아파의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초승달 벨트’로 불리는 이들 시아파 국가 집권층에는 다수의 친이란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들이 내부에서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 솔레이마니는 초승달 벨트 내 친이란 민병대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각종 해외 테러 활동을 사주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장 이라크 등지에서 반(反)미국 여론이 결집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솔레이마니 사망 이튿날부터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시내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미국과 이스라엘에 죽음을” 등의 반미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란 최정예 군사조직 사령관의 죽음에 이라크인들이 애도를 표한 것이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이라크 내부 친이란 민병대들이 미군 공격을 예고하고 있다며 “이라크 땅이 미국과 이란 사이 피비린내 나는 그림자 전쟁의 본거지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증폭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바그다드 북부 알발라드 공군기지와 미국대사관이 있는 그린존에는 로켓 포탄이 떨어졌다.
지난해 10월부터 이라크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반정부 시위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이란의 내정간섭에 대한 분노였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성급한 실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이란 목소리가 이라크 내부에서 거세지고 있던 상황에서 트럼프의 극약 처방이 이라크 내부 반이란 세력을 약화시키고 반미 세력의 결집만 이끌어냈다는 비판이다.
초승달 벨트의 재결집은 미국은 물론이고 우방국들의 이익까지 해칠 가능성이 높다. FP는 시리아 동부 유전지대를 보호하는 미군들을 겨냥한 공습,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미 우방국 무역선에 대한 파괴,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등 친미 수니파 산유국 에너지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 등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란과 가까운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이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놨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