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행방 묘연 ‘스위스 비밀계좌 5000만 달러’ 한진家 흘러갔나

입력 2020-01-05 18:35 수정 2020-01-05 22:03

국세청은 범 한진가 2세들이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상속세를 부과했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한진가 창업주 조중훈 전 명예회장이 사망하기 4개월 전에 이 계좌에서 인출된 5000만 달러(약 580억원)의 흐름이지만, 이에 대한 추가 조사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문제의 5000만 달러는 조 전 명예회장이 2002년 11월 사망하기 수개월 전 인출됐다. 다만 누가 이 돈을 빼냈으며, 어디로 송금했는지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한진가 측 공식 입장은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한진그룹은 2018년 5월 보도자료를 내고 “범 한진가 5남매는 2016년 4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해외 상속분이 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세청이 부과한 상속·가산세 852억원 중 1차로 192억원을 납부했다. 나머지는 5년간 분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진가 측은 당시 과세에 응하는 입장을 밝혔다가 두 달 뒤 이에 불복하는 심판을 조세심판원에 청구했다.

하지만 한진가 측이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2016년 이전에 파악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정황이 포착됐다. 한진가 상속인 중 일부는 검찰 조사에서 공식 입장과 달리 2016년 이전부터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진가 상속 문제와 관련한 법원 판결문에도 ‘2016년 이전 스위스 계좌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했다’는 내용이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국세청은 2018년 4월 조양호 전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을 조세 포탈 혐의로 고발했다. 검찰은 이들이 스위스 비밀계좌 예금 채권을 상속받고도 2014년 6월~2017년 6월 각자 상속분을 미신고한 것으로 보고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위반(해외계좌 미신고) 혐의로 기소했다. 다만 상속세 포탈 혐의에 대해선 2014년 3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 내렸다.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당시 부장검사 김종오)는 2018년 6월쯤 조남호·조정호 회장을 조사하면서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언제 알았는지 추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조 전 명예회장 사망 직후인 2003년 무렵 스위스 비밀계좌의 존재를 알았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스위스 계좌 존재를 알게 됐다”는 한진그룹 입장과 모순되는 진술을 내놓은 것이다. 조남호 회장 등은 뒤늦게 이를 밝힌 이유에 대해 “(2017~2018년 국세청 조사 당시) 2003년부터 알았다고 하면 가중 처벌될 것이 두려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남호 회장 등은 2002년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5000만 달러가 인출된 데 대해서도 진술했다. 이들은 “인출 시점에는 스위스 계좌의 존재를 몰랐다”며 “인출자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해당 계좌 담당자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출 권한이 있는 사람은 조양호 전 회장 아니면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으로 추정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남호 회장 등의 판결문에도 ‘스위스 계좌의 존재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서울남부지법 형사12단독 김유정 판사는 지난해 6월 해외계좌 미신고 혐의로 조남호·조정호 회장에게 각각 벌금 20억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피고인들은 선친 사망 이후 5년간 해외 보유 계좌 신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해외 보유 계좌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수년간 신고 의무를 회피해 죄질이 가볍지 않다”고 판시했다.

추가 조사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인출금 5000만 달러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큰 조양호 전 회장은 지난해 4월, 조수호 전 회장은 2006년 11월 사망했다. 나머지 상속인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이 돈의 행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한 사정 당국 관계자는 “계좌 인출 권한자들이 서로 나누어 가졌거나 제3의 장소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진가 측은 조세심판원에 5000만 달러에 대한 상속세 부과 처분은 부당하다는 심판을 청구해 국세청과 다투고 있다. 사건을 심리 중인 조세심판원 심판1부는 지난해 6월과 12월 두 차례 내부 회의를 진행했다. 한진가 측 주장을 받아들이는 방안도 검토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구자창 손재호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