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트럼프, ‘종이 호랑이’ 대신 ‘강한 이미지’ 택했다

입력 2020-01-06 04:0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공습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기지에서 미군 82공수부대 대원들이 수송기로 이동하는 모습. 미 국방부는 이란의 보복 가능성에 대비해 82공수부대 내 신속대응병력을 중동에 배치키로 결정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2일 오후 5시쯤(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참모들과 대선 전략을 논의하던 중 갑자기 자리를 떠나 다른 회의에 참석했다. 잠시 뒤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중 가장 중대한 외교안보 결정을 내렸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드론 공습으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군(쿠드스군) 사령관을 폭사시키는 그 결정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엄청나게 대담한 것이었고, 심지어 우리 중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은 이 결정이 거대한 도박이며 즉각적이고 엄청난 보복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전쟁 영웅이자 군부 최고 실세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에 이어 ‘두 번째 권력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솔레이마니는 미군의 기습작전으로 숨졌던 9·11 테러의 배후 오사마 빈라덴과 ‘이슬람국가(IS)’의 수장 아부바크르 알바그다디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NYT는 지적했다. 빈라덴과 알바그다디는 테러집단의 수괴였으나 솔레이마니는 유엔 가입국의 군 지도자였다.

NYT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솔레이마니를 사살할 수 있었으나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 우려 등으로 계획을 접었다고 전했다. 전임 행정부는 솔레이마니를 제거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 솔레이마니 폭사 계획을 승인했을까. 미 언론들은 현 상황에서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면서도 이란의 계속적인 도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 미국인을 겨냥한 이란의 추가 공격 우려 등을 원인으로 거론했다. 일각에서는 상원의 탄핵 절차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이유일 수 있다는 의심도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 감행 이유와 관련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지난 연말과 올 초 이라크에서 벌어진 충돌이다. 지난달 27일 이라크 중북부 키르쿠크의 미군 기지가 로켓포 공격을 받아 미국 민간용역 회사 직원 1명이 숨진 사건이 직접적이다. 미국은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기지 공습으로 대응했고 민병대는 바그다드 주재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지난해 6월 20일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해협 인근에서 정찰 중이던 미군 정찰 드론을 격추한 사건도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복 공격을 승인했다가 철회해 ‘종이 호랑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12년 9월 리비아에서 무장 시위대에 의해 미 외교관 4명이 숨졌던 ‘벵가지 사태’를 트럼프 대통령이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당국자들은 이번 공격이 임박한 위협을 막기 위한 방어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솔레이마니 제거는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도 “대응하지 않은 위협이 대응한 이후의 위협보다 더 컸다”면서 솔레이마니 제거를 정당화했다.

일각에선 탄핵과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위기 국면을 탈출하고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거대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분쟁에 빠트렸다”며 이 조치가 더 큰 위기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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