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새해 공식업무 첫날인 2일 고순도 불화수소(불산액) 생산기업을 찾았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일본의 ‘통상 기상도’는 여전히 ‘흐림’이다.
지난해 말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통상갈등을 해소한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두 나라는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에서 접점을 찾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상황에서 통상·산업정책의 수장이 직접 소재·부품·장비 자립화에 무게를 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성 장관은 이날 오후 충남 공주에 있는 솔브레인을 찾아 임직원을 격려했다. 솔브레인은 반도체나 전자제품 제조공정에 쓰이는 소재를 만드는 중견기업이다. 최근 일본 수출 규제 대상 품목 가운데 하나인 고순도 불산액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신·증설했다.
솔브레인이 생산해 낸 불산액은 순도 ‘99.9999999999%’(일명 트웰브 나인)에 이른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바로 투입할 수 있을 정도다. 일반적으로 불산액의 불순물 비중이 ‘100억분의 1’(일명 텐 나인)만 돼도 반도체 제조공정에 사용 가능하다. 솔브레인이 생산한 ‘트웰브 나인’ 불산액은 불순물 비중이 1조분의 1 수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일반 불산액과 달리 ‘텐 나인’ 이상의 고순도 불산액은 일본에서만 만들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일본산 수입에만 의존한 이유다. 일본 역시 이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수출 규제 품목으로 정했다.
솔브레인이 고순도 불산액의 대량 생산능력을 갖추면서 국내 수요 중 상당 규모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산업부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첫 자립화 성과가 나왔다”고 강조했다. 성 장관은 솔브레인 임직원을 만난 자리에서 “고순도 불산액 조기 생산능력 확충은 일본 수출 규제 이후 민관이 힘을 합쳐 대응한 대표적 성과”라고 치켜세웠다. 강병창 솔브레인 대표도 “조기에 불산액 설비 신·증설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화학물질 관련 인허가 규제 완화 등 범정부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소재·부품·장비 산업 자립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관련 기업의 화학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고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는 등 지원사격을 해왔다. 솔브레인 외에도 최근에 불화수소가스, 불화폴리이미드 등 일본 수출 규제 대상 품목을 생산하는 시설을 완공한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산업부는 설명했다.
소재·부품·장비 분야 해외 기업의 생산시설 및 연구·개발(R&D)센터 유치도 본격화되고 있다. 반도체 장비회사 램 리서치는 지난해 11월 한국에 R&D센터 투자를 확정했다. MEMC코리아는 같은 달 실리콘웨이퍼 생산공장 준공식을 했다. 정부는 지난해보다 소재·부품·장비 산업 지원 예산을 2.5배 늘렸다.
그러나 수요기업인 대기업과 공급기업인 중소·중견기업 사이에 ‘벨류체인’을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수요기업에서 국내 소재·부품·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립화’는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아무리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대기업이 써주지 않으면 돈만 날리고 끝나는 것”이라며 “벨류체인 형성에서 구체적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