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사납금제 없앴더니… “월 440만원 내라” 변칙 사납금 등장

입력 2020-01-03 04:07

올해 1월 1일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법인택시의 사납금 제도가 사라지고 택시 기사가 모든 운송 수입금을 회사에 낸 뒤 월급을 받는 ‘전액관리제’가 시행됐다. 그러나 일부 회사에서 이 운송 수입금을 기존 사납금제와 비슷하게 운용하는 등 벌써부터 바뀐 제도를 악용하고 있어 기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법인택시 월급제 시행 초기에 이러한 움직임이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는 만큼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서울의 택시기사 A씨(58)는 지난 31일 자신이 소속된 회사 게시판에 게시된 ‘임금협정 체결 내용’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사측은 “월급제가 시행됨에 따라 임금은 월 200만원(성과급 별도)을 지급할 것”이라면서도 “성과급 산정을 위해 다달이 내야 하는 ‘월 기준 운송 수입금(이하 월 기준금)’은 평균 440만원”이라고 공지했다. 월급 지급 조건에는 “26일 만근 및 월 기준금 전액을 입금한 경우”라는 내용도 붙어있었다.

이 회사는 기사들이 월 기준금을 채우지 못하면 30여만원의 상여금도 지급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명시했다. 또 월 기준금을 50만원 이상 미납할 경우 승무 정지 조치를 하고, ‘무노동 무임금’ 처리하겠다고도 했다.

택시 기사들은 사측의 소위 ‘월 기준금 규칙’을 이름만 바뀐 사납금제로 보고 있다. 월급을 온전히 받기 위해 400여만원의 월 기준금을 채우려면 하루에 대략 15만~16만원을 회사에 내야 한다는 계산이다. 지난해 매일 12만~13만원가량의 사납금을 냈던 것을 고려하면 3만~4만원 정도가 오른 셈이다. A씨는 “전액관리제 시행으로 월급이 오르긴 했지만, 하루에 수만원을 더 내야 하는 걸 고려하면 월급은 도리어 깎인 것”이라고 토로했다.

다른 택시회사 소속 조모(63)씨도 “원래 사납금을 제외한 수입은 모두 기사 몫이었는데 올해부터는 몽땅 회사에 바쳐야 할 판”이라며 “택시기사 처우를 위해 사납금제를 없앴다곤 하지만 오히려 월급이 줄어들 것 같다”고 했다. 19년 동안 택시기사로 일했다는 박모(57)씨는 “‘타다’ 등 공유경제 서비스 등장으로 손님들이 분산되는 상황에서 사납금을 사실상 30% 가까이 올린 건 우리한테 죽으라는 소리”라며 “임금협정을 무효화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 관계자는 “몇몇 택시회사들이 노조와 이런 식의 합의를 했거나 추진 중인 것으로 안다”며 “법인 택시기사들의 1월 임금이 지급되는 2월 중순쯤 이로 인한 택시업계 갈등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토교통부는 일부 택시 업체의 이런 움직임을 인지하고 과거 사납금제와 유사한 임금 체제는 법 위반이라는 지침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보낸 상태다. 국토부 관계자는 “특정 금액을 정한 뒤 미달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임금 수준을 낮추는 것은 과거 사납금제와 다를 바 없다”며 “상황을 더 지켜보고 필요한 경우 법을 위반한 업체에 대한 행정처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지난 7월 사납금을 채우려는 기사들의 승차 거부와 불친절한 서비스, 난폭 운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올해 1월부터 전액관리제를 시행하고, 2021년부터 정식 월급제로 전환하기 위해 관련법을 개정한 바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법 개정을 통해 사납금제를 운영하는 택시 업체들을 상대로 행정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명확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