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교회개혁’이라는 단어의 혼란스러움이 있습니다. WCC를 지지하는 측이나 반대하는 측 모두 ‘바른 교회개혁’이라는 같은 이유를 내세웠지만 서로 다른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WCC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기독교인들 안에서 싹튼 인류애 정신, 즉 교회가 힘을 합쳐 인간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보자는 사상이 그 뿌리에 있습니다.
잘못된 정권과 정책에 대한 저항, 고통받는 약자에 대한 도움, 인종차별 반대, 자연환경 보존, 성차별에 대한 거부 등 인류가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가 교회 앞에 놓인 숙제들이었습니다. WCC 찬성파들은 교회가 힘을 합쳐 그러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모습 속에서 ‘교회개혁’의 정신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한편 반대파들은 WCC를 인간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본주의 신학운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다양한 교파나 종단들을 하나로 합치려면 어쩔 수 없이 각 교단이 가진 교리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로 인해 결국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성경의 사실조차 부인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반대파들은 WCC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까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단호한 거부 의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막는 것이 바른 교회개혁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WCC 찬성파나 반대파 모두가 바른 교회개혁의 정신이 자신들의 판단 근거였습니다. 교회개혁에 대한 이해의 혼란은 양교단이 분열되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루는 주제만 달리할 뿐 여전히 조국교회의 갈등 근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각 교단이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교회개혁의 근원과 기준은 ‘이신칭의’와 그것을 도출시킨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관점과 주장이 다르다 할지라도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뿌리를 미뤄두거나 부정한 채 ‘교회개혁’을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기준이 없다면 여전히 한쪽은 ‘수구 근본주의자’라 매도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종교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나 그들의 후예인 청교도들은 성경을 캐논(Canon·기준,자,규범)이라 부르길 좋아했습니다. 사물의 크고 작음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캐논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무엇이 바른 교회개혁인가’ 라는 질문은 캐논이 되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오래된 교리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이 지점에 교회개혁의 알파와 오메가가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그 후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묻고 어떻게 이해하든지 성경의 지지에 기뻐하고 성경의 꾸중에 예민한 것이 ‘교회개혁’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봅시다. 성경을 뒤로 밀어둔 채 사회현상이나 윤리 혹은 인간 양심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면 다양한 사회현상과 인간 양심의 가변성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성에 의해 모두가 길을 잃는다는 것을 다양한 사건들과 그 주역들의 뒤안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며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던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경)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의 ‘교회개혁’을 바라보는 갈림길입니다.
약력=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영국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신학대 수료, 웨일즈복음주의신학교 신학석사(ThM). 현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실행이사, 한국오픈도어선교회 실행이사, 하남 혜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