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가 이렇게 많은데, 왜 좋은 목가구를 만나는 게 이렇게 어렵나요?”
내게서 목수 수업을 받는 분들이 한 일 년쯤 전시와 페어 등을 열심히 다닌 후 거의 꼭 하는 질문이다. 물론 나 역시 굉장히 궁금했던 부분이다. 나는 그 이유를 목수들에게 ‘거리감’을 유지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목가구에는 ‘나무’나 ‘기술’은 보이지만, ‘가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목수는 아름다운 결을 가진 나무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높은 기술 수준을 습득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친다. 둘 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그 노고의 과정을 통해 목수들이 나무와 기술에 ‘빠져버린다’는 점이다. 가구를 만드는 목수에게 ‘나무’나 ‘기술’은 아름다운 목가구를 위한 하나의 과정, 도구이다. 목수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목가구’이지 나무와 기술이 아니다. ‘아름다운 목가구’를 위해서 때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능력은 물론 나무의 결이 가진 아름다움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 짜맞춤이 과도하게 드러나 있는 가구나 온통 현란한 나뭇결로 맵핑되어 있는 듯한 가구가 높은 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이 목적인 요리사라면 아무리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야채라도 다른 식자재들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면 뺄 것이고, 아무리 정교한 칼놀림이 가능하더라도 칼질 없이 통감자 그대로를 넣기도 할 것이다. 목수와 목가구의 관계도 이와 같다.
물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좋은 목재를 구하거나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가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늘 자신의 작업과 목적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해 말에 느낀 피로의 여파 때문이다. 연말을 핑계로 갑자기 많은 사람을 만나며 조금 놀랐다. 유독 사회, 정치적으로 소란스러웠던 해답게 모임에서도 관련 이슈들이 화제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 내가 놀란 부분은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그 이슈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기라도 한 듯 거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토해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았다. 몇 십분을 얼굴이 빨개지도록 성토를 하면서도 사실관계나 그 사건의 맥락에 대한 전제나 설명이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사실관계를 확인 혹은 정정하거나 약간이라도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면 마치 ‘부모 죽인 원수’라도 되는 양 불같은 화를 내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자신의 ‘의견’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심한 감정이입이 일어난 듯 보였다. 정상적인 토론이나 의견 교환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판단을 위해서는 내용에 대한 정확한 파악 외에도 거리감이 필요하다. 모두 알듯이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드러난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도 너무 많다. 사실과 맥락 사이의 격차가 큰 경우도 흔하다. 어떤 현상에 대해 최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실관계의 확인은 물론 사실과 맥락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구나 누군가에게 의견을 전달하고,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라고 느낀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나의 목수학교에도 신입생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나무를 구별하고, 끌과 대패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홈과 촉을 기막히게 따는 모습을 상상하고 공방에 들어선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나무나 기술과 거리를 두는 감각이다. 나무에 대한 이해나 기술적 성취는 조금 늦거나 빠를 뿐 결국 누구나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습득의 과정에서 거리의 감각을 함께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나무와 기술의 달인은 될지 모르나 가구를 잘 만드는 ‘장인’은 되기 어렵다.
새해가 밝았다. 목수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의 새해 소망은 좋은 가구와 소통이 즐거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경계와 타인에 대한 희망을 ‘거리감’이라는 단어로 숙고해 본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