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일본 문화예술계 최고 뉴스는 1월 중순에 있었던 전통 연극 가부키 배우 이치카와 에비조(市川海老藏)의 ‘습명(襲名)’ 발표다. 습명이란 일본 전통예술계에서 선조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그는 오는 5월 이후 ‘에비조’라는 이름 대신 ‘단주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치카와 에비조는 오는 5월 제13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가 되는 의식을 치르고 3개월에 걸친 전국 투어 공연을 개최할 예정이다. 2019년 내내 이치카와 에비조로서의 마지막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로 그가 나오는 가부키 공연은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한국의 경우엔 전통예술 분야 거장이라고 해도 대중적 인기와는 대개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일본에서 가부키는 지금도 인기 있는 공연 장르다. 스타급 가부키 배우들은 가부키를 넘어 드라마나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한다. 이치카와 에비조만 하더라도 2003년에 최고 스타만이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NHK 대하드라마 ‘무사시’의 타이틀롤을 맡기도 했다.
이치카와 단주로(1660~1704)는 에도시대에 활동했던 가부키 배우의 예명이다. 본명이 호리코시 에비조이며, 영웅적이고 호방한 역할에 뛰어났다. 당대 최고 인기 배우였던 그는 ‘47인의 낭인’ 등 18편의 대표작을 갖고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 특별한 장기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는 ‘18번’이 이치카와 단주로에서 나온 것이다. 이치카와 단주로라는 이름은 세대를 이어가며 300년 넘게 세습됐다.
가부키 분야에는 이치카와를 비롯해 나카무라, 마쓰모토, 반도, 가타오카, 오노에 등 10개 정도의 명문 가문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치카와 단주로 가문은 ‘문화계의 천황가문’으로 불린다. 이치카와 에비조가 2010년 아나운서 고바야시 마오와 결혼할 때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 유명 인사 1000여명이 참석했고 방송사마다 생중계를 했다.
습명을 앞둔 이치카와 에비조는 본명이 호리코시 다카토시다. 이치카와 단주로 가문은 대대로 상속자의 이름을 ‘이치카와 신노스케(市川新之助)→에비조→단주로’의 순으로 물려준다. 호리코시 다카토시도 5살 때 첫 무대를 밟은 뒤 7살 때 이치카와 신노스케의 이름을 물려받았고 2004년에 이치카와 에비조를 습명했다. 이후 2013년에 12대 이치카와 단주로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7년 만인 올해 이치카와 단주로라는 이름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이치카와 에비조가 단주로라는 이름을 물려받는 동시에 그의 7살 장남 호리코시 간겐은 이치카와 신노스케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치카와 에비조는 2020 도쿄올림픽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인 ‘도쿄 2020 일본 페스티벌’의 4대 기획 프로그램 중 하나에도 출연한다. 사실상 그를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동서양 문화의 융합, 전통과 현대의 대비라는 관점에서 일본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가부키와 서구 공연예술의 역사가 응축된 오페라를 섞은 ‘빛의 왕’에 주인공으로 나온다. 2019년에 이어 2020년에도 일본 문화예술계 최고의 화제는 그가 될 듯하다.
일본은 사회 전반에 걸쳐 세습 문화가 뿌리 깊지만 특히 전통예술 분야는 선조의 이름을 이어갈 정도로 유별나다. 가부키만이 아니라 전통 음악극 노가쿠, 전통 희극 교겐, 전통 인형극 분라쿠 등도 마찬가지다. 습명은 단순히 이름을 잇는 것이 아니라 선조의 기예까지 세습하는 것이다. 전통예술 분야에서 기예는 오랜 수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 관객들은 가업을 이어온 배우를 높이 평가한다. 덕분에 명문가 출신 배우들은 그렇지 않은 배우들보다 높은 위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습명으로 대표되는 전통예술 세습 문화에 대해 누구나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실력이 있어도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회를 갖지 못하는 등 차별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중순 일본 도쿄신문은 국립노가쿠당이 프로 노가쿠 배우 양성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연수생 제도와 관련해 4개월 반에 걸친 공모에도 불구하고 응모자가 1명도 없었다고 보도해 충격을 줬다. 600년 역사를 지닌 노가쿠의 전승에 위기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국립노가쿠당이 1984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6년제 연수생 제도의 지원자는 감소 추세를 보여 왔다. 1기에는 60명이 응모했지만 2014년 9기는 7명, 2017년 10기에는 4명만이 응모했다. 국립노가쿠당 외에 일본 국립극장 역시 가부키 공연에 필요한 사미센 연주자 등의 연수생 지원자가 없어 재응모를 받고 있다.
노가쿠 관계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노가쿠를 접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연수생 응모자 부재의 이유를 댔다. 연수 이후에도 경제적 안정이 어렵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곳곳에서 세습 제도의 폐해가 ‘응모자 0명’의 결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가쿠나 가부키의 명문 가문 자제들이 어릴 때부터 각광을 받으며 스타로 성장하는 것과 달리 연수생 제도로 양성되는 배우들은 아무리 잘해도 인기를 얻기가 쉽지 않다. 국립노가쿠당이나 국립극장이 뽑는 연수생은 주역을 제외한 나머지 역할만 맡게 되기 때문이다. 주역은 명문 가문에서 습명을 받은 배우들이 도맡는다. 개성과 평등을 중시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문에 의해 주역이 맡겨지는 세습 문화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전통예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습문화의 균열이 일본 사회 전반으로 번질지는 미지수다. 일본 정계만 봐도 세습 정치는 하나의 문화다. 세습 의원 비율이 60%에 달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20% 수준으로 줄었다고 하지만 자민당의 경우 여전히 30% 정도가 세습 의원이다. 2009년 세습정치를 비판하던 민주당이 권력을 잡은 후 국정 운영에 실패하면서 세습정치에 대한 비판은 일본 사회에서 다시 사라진 모습이다. 실제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현 내각의 주류는 세습 정치인들로 이뤄져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