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의 잔인한 그날이 정신없이 지나고 다음 날 보고가 왔다. 그룹 계열사 직원의 아이가 그 배에 탔다는 소식이었다. 설마 나는 해당이 없으리란 교만에 벌을 받은 듯 철렁했다. 눈에 띄는 게 조심스러워 작은 차를 하나 구해 타고 조용히 실종자 가족이 머무는 체육관 근처에 가서 전화를 했다. 눈에 들어온 광경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무슨 소식이 왔는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게시판 쪽을 향해 달려가는 그 장면. 아무리 여러 번 TV를 통해 보았어도 소리와 현실이 더해진 그 자리에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뭐라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몇 마디 위로를 간신히 전하고는 그냥 다시 돌아섰다. 야구를 좋아했다는 아이는 한참이 더 지나 292번째로 두 달 만에 부모에게 돌아왔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이제 5년이 넘었으니 이야기해도 되겠지 싶다”며 풀어놓은 글에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처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충격에 빠진 직원을 살펴준 정신과 의사인 지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아빠가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 하도록 내버려 둬라’ 했더니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직원의 회사 대표가 참 든든했다는 회고에선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직원은 박 회장에게 동지팥죽 두 그릇의 기프트 문자를 보냈다. 박 회장은 “난 해준 게 별로 없었는데 동지(冬至)라고 내게 팥죽을 보내주는 정이 고맙기 짝이 없다. 안 차장 고마워. 팥죽 잘 먹을게”라며 페이스북에 올린 ‘잠 못 이루는 밤에 조금 긴 글’을 마무리했다.
박 회장은 이른바 ‘SNS 셀럽(유명인)’이다. 지갑을 안 챙겨가 냉면집에서 부하 직원에게 돈을 빌려 밥값을 냈다거나, 부인 몰래 총각김치에 밥 먹으려다 흘려서 혼났다는 사연은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소탈하고 탈권위적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고민에 귀 기울이고, 함께 아파하는 그의 소통 방식이 여느 재벌 3, 4세와는 다르게 비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쌓인 이미지는 박 회장 메시지의 진정성도 담보하게 됐다. 그가 스타트업 기업인들을 옥죄는 규제를 없애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올해만 국회를 15차례 찾아간 일을 회고하며 울먹이는 모습이 얼마나 큰 울림을 줬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적어도 그의 행동을 ‘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박 회장은 기업인이다. 기업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은 이윤추구다. 한때는 기업인은 무엇이 돈이 되고 안 되는지에 대한 판단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기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재계에도 퍼져나가고 있다. 박 회장도 이 점을 모를 리 없다.
안타까운 건 여전히 상당수의 재벌 3, 4세들의 공감·소통 능력이 개탄스러울 정도라는 점이다. 굴지의 대기업 총수 집안은 무급휴직을 하는 것도 모자라 희망퇴직에 내몰린 직원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매, 모자간에 험한 꼴을 연출하며 경영권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입으로는 ‘상생’을 외치지만 그룹 내 비상장 회사나 하청업체를 쉽게 꿰차고 앉아 경영권 승계에만 몰두하는 인사도 수두룩하다.
똑똑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기업이든 어디든 좋은 리더의 우선 조건이 명석함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요즘 시대에 리더에게 요구되는 가장 필수 덕목은 균형감이 바탕이 된 공감능력이 아닐까 싶다.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칠레 시위의 도화선은 정부의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 발표였다. 특히 칠레 경제산업관광부 장관이 “새벽에 일어나 조조할인을 이용하라”고 말해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이처럼 리더의 공감능력 결핍은 조직을 넘어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