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숙 (9) 늘 꿈꾸던 이웃 위해 ‘변화 인자’ 되는 길 찾다

입력 2020-01-03 00:06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두 번째)가 1986년 충북 괴산 송면의 아동과 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급식사업을 후원한 미국인 후원자 릭 라산드로(왼쪽 두 번째)씨와 해당 초등학교 앞에서 함께 한 모습.

1965년 우리 대학 졸업예정자 98%가 현모양처를 장래희망으로 꼽았다. 나는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었다. 졸업예정자는 마지막 학기에 ‘직업과 여성’이란 특강을 들었다. 이를 강연한 총장은 여성이 전문 직업인으로 일하려면 3가지에 탁월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과 지적 능력, 투철한 사명감이다. 난 모두를 갖췄다고 자신했다. 신체 건강했고, 타고나진 못했어도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지적 능력은 문제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투철한 사명감은 내 강점이다.

1960년대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위한 고아원이 많았다. 전쟁 직후라 정부조차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때다. 뜻있는 분들이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거나 해외 원조단체가 고아 구호사업을 펼쳤다.

나는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한 해외 원조단체에 입사했다. 기독교인이고 영어를 할 수 있어 취업이 됐다.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고 후원자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업무 환경은 좋았다. 출퇴근이 정확했고 주5일 근무했다. 보수도 당시 교사나 일반 회사원이 받는 월급의 두 배를 받았다. 아이의 편지를 읽으며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를 후원자에게 전해주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2년 가까이 일하면서 편지 내용이 늘 비슷한 걸 발견했다. 한 아이가 소풍간 이야기를 쓰면 다른 아이들 편지도 모두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같은 환경에서 소풍을 간다고 해도 각자 생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를 텐데, 편지 내용은 한 사람이 쓴 것 같았다. 물론 편지를 받는 후원자는 모두 다르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지만 편지 30장을 번역하는데 반나절이면 끝나는 나날이 이어지자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즈음 같은 해외 원조기관이지만 업무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다른 조직을 소개받았다. 이 기관을 소개한 지인은 영어만 잘해선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입사 시험을 보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전엔 미국인 디렉터에게 영어 평가를 받았다. 영어로 쓰고 말하는 시험이 끝나니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 후 다시 가니 한 아동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줬다. 아동이 당면한 상황을 분석해 아동과 가족, 거주 지역에 변화를 주려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세우라고 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이웃을 위해 ‘변화 인자’(change agent)가 되는 걸 항상 꿈꿨었다. 꼭 이곳에서 일해야겠다는 열망이 생겼다. 나는 또 한 번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미국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지부에 합격했다. 나를 채용한 디렉터는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매우 신선한 일꾼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조직은 어렵고 힘든 아이들에게 뭔가를 계속 공급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생선을 달라 하는 자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등 원조개발단체로서 철학이 분명했다. 사람을 돕는 일이 그를 무능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했다. 조직의 철학이 내 가치관과 일치함에 전율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치를 실현하는 접근법은 현장에서 터득했다. 나는 열악한 농촌과 섬 지역을 선정해 그곳 아동과 후원자를 연결했다. 특히 지역사회 주인인 주민의 역량 강화와 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의 ‘알뜰시장’(Good Will Project), 충북 괴산 송면의 아동급식사업, 충남 아산 탕정의 영유아 보육사업과 아동급식사업은 주민 힘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지금도 기억되는 사업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